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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Aug 12. 2024

글쓰기로의 정착, 글쓰기로의 도피

글을 쓴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보통 글을 쓰는 법에 대해 물어보면 글의 짜임새를 생각해서 도입부와 본문, 결론으로 나누어 쓰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전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대화하는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무엇이든 '반드시'라는 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 대화를 도입부와 본론과 결론으로 반드시 나눌 수 있나? 대화의 마무리는 갑작스러운 인사말로 대체될 때가 많고 보통 도입부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사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며 그런 경우 인사말과 본론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 된다. 그런 때 본론은 단순히 인간관계의 윤활유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으며 특별히 정보 전달이 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특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말하는 경우는 공식적인 발표나, 직장에서의 보고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정보 또한 뉴스에서 본 것에 지나지 않아서 설득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단지 출처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 걸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분이 좋기 위해서이다. 너무 단순한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건 입 밖으로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거대한 비밀일 필요는 없다. 단순히 기분이 어떻다, 상대방 외모가 어떻다, 오늘 습도가 높다, 기분이 좋다 등 무엇이든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내뱉을 수 없다면 임금님 귀가 크지 않아도 충분히 병들 수 있다. 미국의 악명 높은 ADX 플로렌스 교도소도 다른 사람과의 접점을 없애버림으로써 더욱더 악명이 높아졌다고 하니 이건 이제 상식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외딴곳에 혼자 살아가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무림 고수라던가, 기도에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이건 웬만한 집념이 아니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가능성은 둘 중 하나이다. 생에 대한 아무런 미련이 없거나, 생의 목표, 목적이라는 것에 대해 믿음이 없거나 해서 단순히 매일매일 먹거리를 조달하기 위해 노동이 끊이지 않는 경우, 또는 스스로 매일을 바쳐도 끝나지 않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지웠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서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처럼 지낼 수 있던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는 어쩌면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텃밭에 온갖 것을 재배하고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을 기르느라 하는 노동이거나 아니면 '생활의 달인'처럼 매일매일 장사에 치이는 경우일 것이다. 스스로 매일을 바쳐도 끝나지 않는 미션을 지웠다는 건 끝없는 기도와 수행을 하는 삶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둘을 나란히 놓은 것은, 지극히 속세의 삶에 묻혀 있는 것은 어쩌면 수행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혹시 환생이라는 게 있어서 해탈할 때까지 생을 반복해야 한다면, 속세의 삶에서 일에 파묻혀 살아본 사람이야말로 해탈이 가장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그 둘과 성격이 아주 다른 것이 마지막에 있다. 혼자서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처럼 지내는 것. 춤 연습이나 무술 수련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 사이에 있는 듯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혼자 지내는 것 말이다. 나는 이것이 책 읽고 글을 쓰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소통은 주고받는 것이어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고서도 의사소통의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책을 읽고 이해했을 때, 그것은 엄밀히 의사소통은 아니다. 상대방이 의사 표현을 하고 내가 그 표현을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소통은 대화를 통한 일상적인 것을 뜻한다. 차근차근 배경으로 잘 깔아 두면 오해로 인해 벽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쓰여진 지 몇십 년 뒤에 그 책을 읽는 것도 의사소통의 노력을 한 것만큼이나 뿌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독서는 혼자 지내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작가 입장에서는 책을 출판하고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개정판이 나온들 내 손에 든 책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읽는 동안 작가가 옆에서 뭘 해주는 것도 없다. 심지어 내가 그의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죽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나는 의사소통하는 기분을 느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가 읽을지 읽지 않을지도 모르는 글을 쓰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의사소통을 하는 느낌을 나에게 줄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남의 글을 읽는 것이 의사소통을 하는 듯한 착각을 줄 수 있다면 글을 쓰는 것도 의사소통을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첩에 글을 써오면서 제대로 느낀 것이 있다면, 헛소리라도 종이에 새겨지면 혼잣말보다 낫다는 것이다. 혼잣말은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알지만, 글을 쓰면 그 종이는 그 수첩이 사라질 때까지 그 말을 소중히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그 말들을 그 수첩에 한 셈이 된다. 수첩은 무생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느낌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이다. 그리고 의사소통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수첩에 글을 쓰는 것도 충분히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당히 내성적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확신이 들지 않아도 사람들을 통해 확인을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좀 더 활발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외향적이지는 않다. 외향적인 면이 있으나 그건 필요성에 의한 것뿐이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경우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며, 웬만하면 협업은 피하려고 한다. 협업이 좋을 때도 있지만 이를테면, '혼자 하는 일이 능력에 모자라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나쁠 수는 없는데 협업은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지만 능력에 모자랄 수도 있고 모자라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것이어서 혼자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향적인 사람은 의사소통의 부재가 주는 빈자리를 어떻게 채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내가 내성적이어서 다른 내성적인 사람에게 물어볼 수가 없기에 내 경우에만 말하자면, 그 빈자리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채운다. 게는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모두 필요하다. 글을 쓰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고, 책만 읽어도 답답한 구석이 생게 마련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지면 여백에 적는다고. 나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탈출구는 책 읽기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말이 많지 않은 부분을 글을 써서 보충하는 것이다. 대화는 절반은 듣는 것이고 절반은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것이 부족해서 글을 쓰는 것으로 보충한다면, 말을 듣는 것이 부족한 것은 책을 읽는 것으로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일상적인 대화의 대체품 수준이라면, 너무 잘 쓰려고 할 필요가 없다. 글을 쓰는 게 재미있을 수는 있다. 이건 말이 많은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할 때 흥분하는 것과 똑같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건 아니다. 말을 잘하면서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은 많지만 옆에서는 듣기 싫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하지만 내가 봐도 별로인 건 그게 평균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애초에 무슨 글을 쓰겠다고 거창하게 목표를 세우고 글을 써서는 대화의 대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단한 글들은 구상도 하고 짜임새도 고민한다고 한다. 이해가 가는가? 대화와 연설의 차이가 재미로 쓰는 글과 잘 쓴 글의 차이이다. 그리고 연설문을 쓸 정도가 될 때까지 연습처럼 글을 쓰지 않는다면 그건 평생 글을 쓰지 않겠다는 소리이다.
수첩에 글을 쓰고 컴퓨터에 글을 쓰고 전자책에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이 이것이다. 나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나는 작가로 태어났다는 선언 같은 류의 오만한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은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렇다고 딱히 다른 사람을 붙들고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글로라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 잘 안다. 잘 쓰는 글이 아니라도 계속해서 써야 하고, 나중에 그렇게 쓴 글 솔직히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용도 외에는 잘 읽지 않는다. 표현을 위한 표현이 절반 이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말을 위한 말이 하루 대화의 80%는 될 것이다. 글을 위한 글이 50%가 넘는다면 하루에 하는 말이 평균적으로 사람들이 대화하는 양의 50%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면서 마음에 있는 것들을 풀다 보면 신기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예를 들어 집 앞에 돌멩이가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없앨 수 없다고 하자. 이게 몇 년째 고민이라고 해도 나는 그 돌멩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닌 이상은 꼭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해야 속이 후련해지는 건 아닌 것이다. 그 돌멩이 때문에 자꾸 자동차 바퀴에 펑크가 난다던가, 내가 출근할 때마다 발목을 접질린다던가 하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단순히 거슬린다는 이유로 반드시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도 소설에서 간혹 등장하는 것처럼 고민상담노트 같은 형식일 필요가 없다. 나는 고민이 있으면 곱씹으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해답을 얻는 편인데, 그것들을 실제 글을 써서 해결한 적은 거의 없다. 글을 쓸 때 솔직하게 써야 한다느니 하는 지시사항들은 다 잊어라. 나만을 위한 글을 쓰는 데 집중해야 한다. 옛날 노트들을 읽어도 '아, 이런 생각을 다 했었구나'하는 내용은 있어도 심각하게 고민하던 것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심각했던 고민들은 지금도 생각이 나지만 기록된 것은 없다. 우리가 고민이 있어도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야 고민을 털어놓지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내가 이런 고민이 있다고 소문내고 다니지는 않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고민을 수첩에 써 보았자 수첩이 해결책을 내줄 것도 아닌데 굳이 힘들게 적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 생각에 솔직하게 적으라는 말은 남에게 보이려고 이상하게 꾸미는 글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내가 읽으려고 글을 쓰기 때문에, 더 솔직히 말하면 쓰기 위한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다행히 거기서는 자유롭다.
남들과 대화가 적은 대신 수첩에 생각을 적는 시간이 늘어나면, 그건 대화가 글의 형식으로 정착된 것일까, 현실에서 글을 쓰는 생활로 도피를 하는 것일까? 말보다 글이 낫다고 생각한다면 도피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내 스타일이 말보다는 글 맞는 것뿐이다. 나는 말을 오래 하면 그날 저녁은 상당히 일찍 잠이 든다. 피로도가 엄청나게 빨리 쌓여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올 정도이다. 차라리 발표회 같으면 그렇게 정해져 있는 자리이니 그런가 보다 하는데 일상 대화가 길어지면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책 한 권 읽어서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책이 다 끝나지 않아서 늦게 잔 적은 많이 있다. 그렇지만 글의 형식이 나에게 맞는다고 해서 내가 글에 정착한 건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기는 하지만, '나는 말보다는 글이 잘 맞아'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건 또 이상하다. 대화를 많이 하면 기운이 빠지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지만 유튜브에서 강의하듯 설명하는 영상은 또 재미있게 보는 걸 보면, 상대만 잘 만나면 대화가 힘들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어질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상대를 찾아다니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다고 속에 있는 생각을 풀지 않을 수는 없으니 글을 쓰는 생활로 도피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지만 남이 아니라 내가 읽는 글을 주로 쓰고, 후에 그 글을 다시 읽을 나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글을 쓴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남이 읽 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가느냐 하는 부분은 나도 아직 알지 못한다. 그건 계속해서 시도하는 도전이다. 그 도전은 매번 새롭다. 벽에 못질을 하는데, 매번 새 못을 쓰는 것과 같다. 벽에서 어느 부분에 못이 박힐지 모르니 못이 망가져도 매번 다시 가져와서 시도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못이 망가져서 새 못을 가져온다는 건,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다른 사람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보이지 않아서 계속 다른 스타일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못은 항상 못이다. 내 글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내가 읽기 괜찮은 글에서 남이 읽어도 괜찮은 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나마 읽을 만했는데 나중에 가서 나만 이해하는 글이 된다면, 조금 슬플 것 같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계속해서 못을 박고 벽에 어떤 흔적이 남는지 살피는 일은 멈출 수가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암호를 새기는 일이다. 단지, 그 암호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을 담고 있어서 해석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아니다. 그건 내 능력으로 해야 할 일이다. 남이 읽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결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혼자 글을 쓰는 일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읽을 글이 첫 번째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남들'도' 읽 글인 셈이다.
그런 글을 쓰게 되면, 더 이상 대화 대신 글의 세계로 도피한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만 말에서 글로 바뀐 셈이 될 것이다. 원래 그랬기는 하지만 딱히 그렇게만 설명할 필요는 없는 그런 어중간한 상태에서 확실한 양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처음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국경을 넘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한다며 희망에 부풀었던 2000년대 초반이 생각난다. 닷컴 붐이 일었던 그때, IMF의 그늘에서 단번에 탈출할 수 있을까 싶었던 그때가 생각서 한편으로는 나에게는 헛된 희망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그만 쓸 것도 아니고, 남에게 읽힐 만한 글을 써 보려는 노력을 그만둘 것도 아니다. 언제나 걸음마다 만나는 요철은 한편으로는 걸려 넘어질 방해물이기도 하지만 돌풍이 불 때는 디딤판이 되기도 한다. 글이 나에게는 그런 존재이다. 넘어서지 못하지만 일단 내가 온 곳에서는 후퇴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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