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손이 있는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는 물건을 집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 글로 영향력을 강력하게, 혹은 효과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마치 똑같이 물건을 잘 던진다고 해서 모두가 창던지기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 이야기가 언제나 이즈음 되면 나오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아마추어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지를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딱 그만큼 글을 쓸 수 있고, 그만큼만이라도 온전히 능력을 발휘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누구나 어디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서 가지 말자고 생각하는 분야가 있고 그래도 가는 데까지는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있는 법이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 길을 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그런 일이다. 내가 욕심부리지 않고 꾸준히 하는 세 가지는 운동과 투자와 글쓰기인데, 투자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손해를 보더라도 모아진 총량 자체가 투자를 하지 않았을 때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을 것이기 때문이고, 운동은 하지 않으면 관절을 근육이 땅겨서 간지러워지는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만 꾸준히 한다. 글쓰기 역시 며칠동안 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그 느낌을 받지 않을 그만큼만 계속하게 된다.
이 세 가지 모두 공통점은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집중해서 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이십 년 동안 나에게 글쓰기가 맞지 않는 일이라는 말을 들어오면서 글을 쓴다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책을 읽으면서 공상에 잠기고는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공상이 형체를 가지면 글이 되는 것이었다. 그 공상을 처음부터 다 노트에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 공상이 곧 내 글이라는 사실은 비로소 내 글을 써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비교할 것이 구체적으로 있어야 비교가 가능한 일이니까. 그리고 책에서 공상이 강렬하게 나타나는 부분을 읽게 되었을 때, 그 공상이 인상 깊은 나머지 그 문장들에 밑줄을 친 데서 시작해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데로 나아가는 데 칠 년정도가 걸렸다. 아니, 칠 년 정도가 걸렸다고 하면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데 걸린 시간 같지만 실제로는 그저 그 사이에 칠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내가 글을 쓰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까. 단지 결과가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었을 뿐이니까.
학문이나 올림픽 경기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영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을 존경하듯이 나는 글로써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누구나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무조건 팔리는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존경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세계적인 선수라도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메달은 다른 문제고 그 사람은 좋아하지 않듯이, 그래서 그 사람의 경기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듯이 노벨상을 받는다고 해도 글로 이미지 세탁이나 하려는 사람들,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사람들, 책 밖의 지위 같은 것으로 책 판매량을 늘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매 부수야 어떻든 다른 문제고 그 저자와 책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으려고 한다.
서점에 나가 수많은 책들을 돌아보면 마치 하버드 대학교에 견학 가서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공부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할 때 저런 느낌일가 싶을 정도로 전율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운동도 그렇지만 글을 쓰는데도 기준이 없다. 어떤 기준이든 0%와 100%가 생기기 마련이데. 그런데 100%가 되면 기분이 좋을 수도 있지만 혹여나 3%나 4%라면 어떻게 될까?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처음 밑줄을 긋기 전, 나는 글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때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글을 잘 쓰기 때문에 세상에 글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이건 확실히 해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좋아질 수 있다. 그건 일종의 믿음이다. 아직 결과를 확인하지 못한 실험 예측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도 수긍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노력에 비해 글이 늘지 않았다고 이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써야 한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대신 글에 생각을 풀어놓는다고 해도 좋고 단순히 글쓰기가 정서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해도 좋다. 어쨌거나 나는 누군가에게 검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고, 필요한 것이 그 과정인 만큼, 그 결과물이 쓰레기 같지만 않아도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수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춘하추동 논에 나가서 바람을 맞고 햇빛을 쬐는 것이 좋아서 농사일을 하는(쓰다 보니 미친 사람 같기는 하다)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이 농사일을 완전히 망치는 것도 힘들 것이다. 추수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낟알을 모으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사람의 논이 장마로 망가졌다면 그 사람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똑같을 것이다.
아직 글을 쓰기보다는 남의 글을 읽는 것이 더 좋다는 분들을 위해 지난날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글을 읽는 것이 좋으면 글을 쓰는 것도 기분이 좋은 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독후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책을 읽고 그 느낌을 쓴 글이라는 뜻의 독후감은 책을 읽으면 뭔가 남아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쥐어짜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책 전체보다는 책의 부분 부분에서 느끼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더욱이 자기 계발서 같은 경우에는 '책 전체적으로는 쓰레기이지만 이러이러한 부분이 많이 남는다'라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것은 독후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글로 간직할 필요가 있다. 책 전체적으로 쓰레기라는 내용의 독후감은 없다. 그건 건질 게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건 오히려 평론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독후감 말고 책에 밑줄을 그어 보고 그 밑줄에 대한 메모에서 시작해서 나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뭉뚱그려 말하면 바로 글쓰기이다. 그런 것을 그 순간에 생각만 하고 넘어갈 수도 있고 사실 그러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글 쓰는 것이 번거로울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단지 나는 그것을 가록으로 남기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글로 남겨 보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몇 년이 지나 그 글을 읽어 보면 어디선가 베낀 것이 아닐까 싶은 글이 섞여 있게 된다. 당시에는 당연한 생각이었더라도 상황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그런 생각은 할 수 없게 되니까.
독서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라고 했다. 독자 입장에서는 그보다 대외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대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대화가 한 번에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 보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꼭 책이 없더라도 자신과의 대화를 하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만의 글일 것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