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존재하는 것 중 인간의 정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을 꼽는다면 아마 물이 아닐까 싶다. 바이러스 같은 생물도, 바위 같은 단단한 물질들도 물론 물처럼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은 많이 주지만 사실 물처럼 상관도 없는 곳에까지 구석구석 비유로 끌려 나오는 것도 드물지 않을까?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양, 물처럼 한 곳으로 모이는 모양, 물처럼 증발해서 높은 곳으로 가서 다시 흘러내려와 완벽한 순환을 이루는 모양, 물처럼 장애물을 신경 쓰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모양, 물처럼 한 방울 한 방울로 바위를 뚫듯 꾸준함으로 결국 뭔가 해내고 마는 모양, 물처럼 뭔가가 섞이면 금방 퍼져 나가는 모양 등 공기에 비해서도 너무 많은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당연해 보이지만 필수요소는 필수요소인 것처럼 물 역시 너무 흔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가 항상 물을 마신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예로 든 문장들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이 있어서 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오늘은 이 물의 비유에 하나를 더하려고 한다. 스토리. 우리 몸의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고 하루에 2리터의 물은 마셔야 하고 간이 올바로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안팎으로 물을 친근하게 여긴다. 필수적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우리 삶에서 스토리가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주변에는 스토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어서 소설책을 집어든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은 우리가 우리 주위의 물을 당연하게 생각한 나머지 수도꼭지를 물이 나오는 곳, 정수기를 마실 물이 나오는 곳, 냉장고의 물병을 내가 마실 물을 담아두는 곳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도구의 이름, 즉 수도꼭지, 정수기, 물병 등 명칭으로 고착화된 이름으로 생각 없이 부르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어떤 것도 이야기를 담고 있는 특별한 사물이나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술을 많이 마시고 숙취로 하루이틀 글을 쓰지 못할 때, 회사에서 머리를 싸매고 기획서를 쓰고 그 일을 추진해 나가느라 며칠간 모든 신경을 글쓰기에서 거두어야 할 때, 그 자체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혼잣말을 할 수는 있지만 그 뒤로 다시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방의 모든 사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입은 옷, 들고 있는 가방, 기다리는 버스, 사거리의 꼬리물기 등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치면서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의 갈고리가 실뭉치에 걸리는 순간, 머리에서 손가락으로 찌릿하는 느낌이 나면서 글이 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다림을 잊어버리면 막연히 가만히 있는 시간과 글을 쓰는 시간은 다를 것이 없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이 모두 퇴근 시간에 집을 향해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앞차에 더욱 바짝 붙기 시작하는 것이 어떻게든 빨리 차선을 바꾸려고 조마조마해하는 사람들과 섞이면 더욱 정체를 심각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시동을 건 차들로 가득한 주차장인 것 똑같다는 심정으로 시작되는 글이 될 수도 있고, 차 한 대 간신히 들어갈 만한 틈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와 알맞은 타이밍에 브레이크를 밟아서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체 구간에 서 있는 차의 운전자는 회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짜증을 자기 의도대로 착착 움직이는 자동차로 푸는 것인가 하는 글이 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자동차는 운전자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단, 운전자의 팔다리가 운전자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면 말이다. 운전자가 의도한 위치에 손과 발이 가 있고 운전자가 의도한 만큼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면 과속이나 미끄러짐 등으로 운전자의 판단을 물리적으로 비껴나가지 않는 한은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 또한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생각을 하는 것은 어쨌든 흐름을 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 갑작스럽게 핸들을 끝까지 꺾으면 안 되는,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다를 게 없으니까. 그러니 오랜만이라서 글을 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간단하다. 주차장에 가기 전에 자동차까지 가서 문을 여는 것이 귀찮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물병처럼,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일 뿐, 실제로는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실제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참는 것처럼, 혹은 주차장도 가지 않으면 지하철역까지 걸어야 한다는, 그리고 목적지에서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삶을 영위하면서 해야 하는 일들 중 그나마 나를 채워주면서도 쉬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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