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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엘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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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Sep 22. 2024

혹시 여기...

"잘 있었나?"
"나야 항상 똑같지,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나?"
엠이 고개도 들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읽고 있는 책에서 지금 부분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재미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내가 들어올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엠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더니 잠시 후 읽던 부분에 검지 손가락을 끼우고 책상 위에 덮어 놓으며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차가 달리다가 옆 차선의 마차를 추월하려는 찰나에 말이 옆차선 말이 내는 소리를 듣고 멈칫하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인공 마님이 자전거 속도를 미친 듯이 내서 마차 문짝의 손잡이를 잡고 매달리는 거야. 그리고 발의 위치를 살금살금 바꾸어가면서 디딜 곳이 있나 찾는데 자칫 잘못하면 마차 바퀴에 발이 닿아서 떨어질 수도 있지만 무사히 마차의 금장식을 발끝으로 딛고 중심을 잡았네. 그리고는 잡고 있던 손잡이를 돌려서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안으로 뛰어든 거지. 그렇지만 안에서도 저항은 만만치 않았네. 주인공 마님의 딸은 눈과 입이 수건으로 묶여 있었는데 입속에 천 쪼가리를 쑤셔 넣어서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앞도 보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손발로 저항은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주인공 마님... 이름이 폴리나인데 딸의 눈을 가린 수건을 풀어 주고 싶어도 저항이 너무 심해서 다가갈 수조차 없었네. 몸에 닿기만 해도 몸부림을 쳤으니까. 그렇다고 엄마 왔다,라고 외치고 싶어도 마부 놈이 납치범이라 들을 수도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
"폴리나가 마님이면, 어떻게 딸이 납치되었다고 자전거를 타고 나설 수가 있지?"
"이 시대에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나 승마나 비슷했네. 그리고 여자가 말을 타거나 자전거를 탄다고 흠이 되지는 않았지. 시내에서 달리지만 않으면. 폴리나가 무리해서라도 마차에 올라탄 것도 시내에 마차가 들어가기 전에 끝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성공했나?"
"폴리나는 딸을 설득하려면 어쨌거나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유리창을 깨고 마부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어. 그리고 마부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말의 재갈이 오른쪽으로 당겨져서 자연스럽게 마차는 도로 오른쪽에 부드럽게 정지했지. 내가 읽은 부분은 여기까지야. 이제 곧 소리를 질러서 따님을 깨우시겠군."
엠이 너무 신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도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뻔했다.
"아니, 어지간히 재미있나 보군. 설명이 너무 생생해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렸지 뭔가."
"그렇지, 뭔가 할 말이 있으니까 불렀겠군. 기억을 더듬어 봐. 지금 기억 못 하면 영원히 기억해내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아니야, 어차피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네."
"그런가? 애초에 내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것 같았는데? 길거리 풍경도 감상하지 않고 곧장 걸어오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긴 하는데 굳이 물어봐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 같네."
"그럼 가볍게 물어보면 되지."
엠이 계속해서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기분 좋아진 분위기를 망치지 말라는 압력이 느껴졌다. 여기서 싱겁게 말을 끊어버리면 분위기가 안 좋아지리라는 경고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내게 대화의 의지가 없다는 뜻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기억이 났다고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꼭 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알았으니 얘기해 보게. 어차피 여기에 나와 있는 이유도 자네와 대화하기 위해서가 거의 다 아닌가? 내 존재 의미를 부정하지 말아 주게."
"그렇게까지 자조적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어. 친구 아닌가, 그래도?"
"알겠으니 말해봐. 그렇게 뜸 들이니 더 궁금해지는구먼."
"알겠어. 얘기하지."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침을 삼켰다. 책 읽기를 방해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아니고, 이 동네에는 서점이 없나 싶어서 말이네. 있다면 둘러보고 싶은데."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엠이 점점 미소를 짓더니 껄껄 웃기 시작했다.
"자네 답구만! 역시, 여기 와서도 서점이 어디 있냐고? 허허허, 대단해!"
"비웃지 말게."
"비웃는 게 아니야! 얼마나 대단한가? 출장을 가도 서점은 꼭 찾아가 보는 자네가 여기서 서점을 찾지 않으면 이상하지! 허허, 왜 내가 먼저 소개해 주지 않았는지가 오히려 궁금하네!"
엠은 한참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한 오 분은 족히 깔깔거린 것 같다. 아마 길에서 걸어 다니던 사람들 중 적어도 열 명은 우리 사무실 창문을 올려다보지 않았을까 싶다.
"다 웃으면 말해주게."
그 말을 듣고도 엠은 손만 휘휘 저어서 말을 들었다는 표시만 할 뿐 웃음은 그치지 못했다. 오른손 검지는 책에게 물린 채로 왼손만 공중에서 춤을 추면서 웃는 모양을 보니 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엠의 동작이 웃길 뿐이어서 그 정도까지 화통하게 웃을 수는 없었다. 단지 미소만 지으며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엠이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 (하지만 얼굴에는 아직도 미소를 계속 활짝 피운 채로) 말했다.
"여기서 서점은 멀지는 않지만 찾기는 힘들 거야."
내가 계속 쳐다보자 엠은 말을 이었다.
"저 뒤에 우리 다음다음 골목에 혹시 맥주 파는 커다란 바 기억 나나?"
"밀러 바인가, 그거 말인가?"
"맞아, 맞아, 밀러! 바로 그거야!"
그러더니 엠은 다시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갔나 보군."
내가 거들자 엠의 웃음이 더욱 심해졌다. 얼굴이 뻘게지도록 웃고 나자 그제야 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고, 배 아파라. 미안하네. 근데 웃기지 않나?"
"뭐가 말인가?"
"자네는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없어."
"알고 있네."
"그런데 가보고 싶은 곳이 서점이라면, 서점에는 무엇을 보러 가는 건가? 책꽂이 브랜드? 이곳의 이케아 같은 것 말이지, 하하하하!"
내가 왜 서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는지 그때 생각이 났다. 몇 년 전, 밤에 자다가 새벽녘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꿈속에서 내가 처음 보는 서점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에는 제목이 없었다. 그러나 굳이 책을 꺼내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가까이 가면 마치 내게 속삭여주는 것처럼 저절로 책들의 내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서점에서 다루는 책들은 실제 서점에서 팔 것 같은 책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서관이었던 건 아니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곳의 책들은 빌려다 보는 책은 아니었다. 내용을 미리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은 구입할 수 있는 구조였으니까. 내용을 알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서점에 서서 책을 한 권 한 권 뽑아서 읽어보는 정도일 뿐이었다. 게다가 같은 책이 여러 권 꽂혀 있는 경우도 있었고.
특이한 것은 그곳을 세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 보니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서점 후문 밖에서 세 아름은 될 것 같은 나무 아래에서 그 나무를 뚫고 내려오는 황금색 빛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와 나누었던 대화가 모두 기억이 난다.
"보통은 책을 게 해주지 않는데 그대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노인의 목소리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심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깨닫고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감사한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깨달은 만큼,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목이 메어서 그러 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라도 대답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에 맞기에, 대답을 했다. 노인은 그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바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 질문이 무엇일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이 편해지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딱히 삶이 들어질 것은 없어 보였다. 앞을 보지 못하면 조금 허우적거리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인생의 묘미 아니겠는가. 나는 생각을 가만히 정리한 후 대답했다.
"예, 물어보십시오."
"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이 기억을 놓고 돌아가겠습니까?"
노인에게 나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놓고 가겠습니다."
"그럼, 안녕하시 가십시오. 조금 앉아 있으면 저절로 다 끝날테니 나무에 기대서 쉬고 계십시오. 뭔가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더 이상 내게 필요한 건 없었다. 단지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기뻐서였다. 그리고 잠시 후 실제로 잠에서 깨어났다. 내 기억에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기쁨에 겨워서 내내 웃고 다녔던 것 같다. 아마 2021년쯤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기억 때문에 비슷한 구조의 서점이 있는지 돌아다니고는 한다. 그 서점은 둘로 나뉘어서 한쪽은 책만 판매하고 있고 나머지 한쪽은 문구를 팔고 있었는데 그 문구를 파는 곳이 코엑스에 있는 링코와 똑같았다. 아마 본 적이 있어서 반영된 게 아닐까 싶었는데,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서점도 어디서 본 적이 있어서 꿈에 재구축된 게 아닌가 싶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구조의 서점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늘 서점을 둘러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서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다음다음 골목은 지나가면서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실제로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맥주를 마실 일이 없으니까. 이제 슬슬 이 동네도 거리를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왜 갑자기 그렇게 심각해?"
엠이 물었다. 나는 엠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차피 지금 생각나는 건 별로 없었지만. 엠은 심각한 얼굴로 듣고만 있었다. 상상의 세계에서 꿈 이야기를 하다니 이보다 꿈같은 이야기가 또 있을까?
그렇지만 이야기가 끝나자 엠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분이 누군지 알 것 같네. 나무 앞에서의 목소리 말일세."
"그게 누군가?"
"아니야, 말을 해도 자네는 알 수 없네. 나는 자네에게 '하느님 아버지 아니신가!'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정승재 씨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자네는 믿지 못할 거네."
"신 같은 그런 분인가?"
"그런 건 아니야. 오히려 자네 본인에 가깝다고 해야지. 자네 꿈에 나온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럼 그 진리도 나 자신이 펼쳐 놓은 가림막 같은 거겠군."
"그건 아니네. 말로 하기 어려운 문제야."
"그럼 그 진리는 정말 우주의 진리 같은 거라는 소리인가?"
"그렇네. 세상과 자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일 것이네. 별 문제는 되지 않아. 자네가 그런 꿈을 자주 꾸는 게 아닌 이상은 말이야."
"자네도 그런 꿈을 꾼 적 있나?"
"하하, 나는 지금 이게 꿈이나 다름없지. 존재하지 않다가 잠깐씩 존재하니까."
엠이 웃었지만 씁쓸한 느낌은 없었다.
"어쨌든 서점에 한 번 가봐야겠어. 여기 있는 서점에 간다면 어쨌든 그때 그 서점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엠이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잊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 진리를 다시 떠올리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은 말이네. 그리고 그건 자네의 당시 선택을 부정하는 거야. 그건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네."
"알겠어. 그렇게 생각해 보도록 하지. 하지만 서점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궁금하긴 하군."
엠이 다시 활짝 웃었다.
"그래, 어련하시려고.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 신간은 없어, 여기에."
나는 타자기가 놓여 있는 책상으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래에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걸어 다녔지만 공기는 시원했다. 간혹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을 뿐이었다.
"서점이란 말이지. 하지만 여기는 큰 나무가 없으니까, 상관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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