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냉수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냉수로 샤워를 하는 것은 새로운 기분을 느끼기 위한 간단한 도구 같은 거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면서 체력 관리를 해야 한다며 어머니가 데리고 가신 한의원에서 의사는 내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화가 머리로 쏠리는 타입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겠지만 20년이 지난 어느 날 업체 관계자와 싸우고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답답함에 찬물로 머리를 감고 나니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가 가라앉으면서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5년 후, 운동 후 찬물로 샤워를 하면 비슷한 효과를 조금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겨울에도 가끔은, 그리고 여름에는 거의 매일 찬물로 샤워를 하게 된 것 같다.
냉수샤워의 장점이라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고 심장 근육에 도움이 되고 수명 연장이 될 것 같고 어쩌고 하는 말들이 많지만 사실 나에게 어째서 찬물로 샤워를 하냐고 하면 기분이 좋아서라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킬 때의 청량감 같은 느낌을 온몸으로 전달한다고나 할까. 이것은 수영장에서 물에 뛰어들 때와는 또 다르다. 목욕탕에서 냉탕에 들어가는 것과도 다르다.
이번 여름에는 냉수샤워를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회사 건물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나와서 샤워를 할 때도, 집에서 샤워를 할 때도 워낙 밤에도 뜨거운 기운이 식지 않는 날이 계속해서 이어지다 보니 물이 모두 미지근해진 것이었다. 미지근한 물이 씻기에는 더 편하기는 하지만 따뜻해진 소주를 마시는 것처럼 뭔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어제와 오늘은 냉수다운 냉수가 나와서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몸이 훨씬 더 개운해지는 느낌. 추석 연휴 동안에 떠오른 글감이 있었는데 너무 당연한 스토리 같아서 머릿속으로만 대충 구성만 해 놓았다가 연휴가 지나고 이틀 동안 회사에서 밀린 업무를 하다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 최악인 것은 내가 뭔가를, 어떤 스토리를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서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기억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찝찝한 기분으로 주말을 보냈는데 모처럼 그것도 사소한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개운한 느낌은 나에게 일종의 방향 전환의 계기 같은 것을 만들어 준다. 포근한 느낌은 일상의 연장, 현재의 삶에 안주할 수 있는 핑계가 되고 말이다. 그리고 그 개운한 느낌을 만들 수 있는 도구는 무궁무진하겠지만, 현재로서 내가 사용하는 방법은 맥주, 하이볼, 냉수샤워 정도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피로가 풀리면서 느껴지는 개운함은 여기서는 궤를 달리한다. 그것도 개운하기는 한데, 단지 몸의 상태가 좋아진 것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영향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글을 쓰는 것도 똑같다. 기분은 좋아지지만 그다음 행동을 만들지는 않는다. 가끔 책을 읽고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그러면 지금 내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술과 냉수샤워뿐이니 내가 왜 냉수샤워를 좋아하는지 이해했을리라 믿는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운전할 일이 있거나, 출근을 해야 하거나 아무튼 술은 입에 댈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지만 샤워는 상황만 맞으면 언제나 할 수 있다. 하루에 열 번도 할 수 있을 것이다(최대 6번까지는 해봤다. 한여름에.).
그렇게 개운한 기분이 되면 무엇을 하는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석탄을 때서 전기를 만들려면 어떻게 하는가? 석탄을 태워서 나온 열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린다.
우라늄이 붕괴하는 연쇄반응을 전기 만드는 데 사용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연쇄반응으로 나오는 열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린다.
태양과 같은 핵융합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핵융합으로 나오는 열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린다.
지금으로서는 열을 가지고 전기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을 끓여 터빈을 회전시켜 발전기에서 전기를 만드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핸드폰으로 쓸데없는 데에 정신을 쏟지 않으려면 책을 읽거나 글을 써야 한다. 개운하게 만드는 것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 적합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읽는 책이 항상 소설은 아니다. 재테크 공부를 할 때도 있고 단순히 자기 계발서를 읽을 때도 있다. 글은 뭐, 아직은 작가 소리도 어색한 만큼 이런 글 저런 글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써 보는 중이다. 그러나 발전기를 어떻게 돌리든 전기를 써야 한다면 어쨌든 돌려야 하는 것처럼 살면서 정신을 맑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글을 쓰고 글을 읽어야 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것에 푹 빠져 사는 것을 탓하는 건 아니다. 내 말은, 그런 것들이 그저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터넷에 빠져 있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빠져 있다는 자각이 생각보다(남들보다가 아니라 내 생각보다도) 빠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정보도 많을 거고 정작 내가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도 스무 개가 넘지만 느낌을 억압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결국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읽던 책을 다시 읽자'라고 생각하면 다시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을 줄여서 글을 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양보다는 내가 어떤 글을 쓰느냐에 대한 고민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시기라서 생각보다 글을 많이 쓰지는 못하고 있다. 나름대로는 나 자신의 스텝과 시기에 맞춰 잘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정성을 들이고 신중해야 하는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글쓰기가 나에게 힘을 준다는 소리도 이제는 좀 그만 쓰려고 한다. 냉수샤워를 권하는 말처럼 남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말로 도배를 하는 것도 실례가 아닐까 싶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지만 계속해서 마치 바닷속에서 공기방울이 올라오듯이 선명한 것으로 봐서는 오랜만에 냉수샤워다운 냉수 샤워를 한 효과가 아닐까 싶다. 내내 석회가 섞인 물을 정화해서 마시겠다며 맥주만 마시던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전해져 온 커피를 대신 마시게 되면서 르네상스가 찾아오게 된 게 아닐까 한다는 가설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