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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책과 만년필과 수첩과 볼펜과 연필

by 루펠 Rup L

내가 글감노트에 주제만 간단히 적을 때와 글을 쓸 때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없다. 휴대폰 메모장에도 때로 긴 글을 쓰기도 했으니 수첩이라도 긴 글을 쓸 수 있는 일이다. 보통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글자 수를 2,000자에서 3,000자 사이로 한 편의 글의 길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하는데 수첩이나 휴대폰 메모장은 글자 수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서 길어지는 것이나,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펜부터 잡아서 글이 힘없이 끝나 버리는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여행을 하다가 수첩과 짧은 볼펜으로 기록을 하면서 간단한 메모를 하기도 하고 긴 글을 쓰기도 했다. 생각보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하드커버 수첩이 마음에 든다. 유사 가죽으로 된 물렁한 수첩보다 공책처럼 표지부터 다 종이로 되어 있거나 아예 단단한 커버가 나에게 잘 맞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글을 쓰는 면적이 어느 정도 이하가 되는 편이 쓰기에 더 편하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렇게 손으로 쓰고 나면 긴 글도 키보드로 옮기면서 얼마든지 길이는 조정할 수 있다. 단, 긴 글을 줄이는 것도, 짧은 글을 늘리는 것도 당시에 무슨 글을 쓰려고 했었는지 기억이 나야 가능하지, 옮겨 쓰면서 동시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전까지는 다이어리 크기의 노트에 연필을 가지고 글을 썼다. 연필은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기다랗다. 그렇게 연필로 글씨를 쓰고 있으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글 연습을 하던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때는 지금보다 연필이 훨씬 더 길게 느껴졌겠지만 그람에도 그때 생각이 다시 나는 이유는 지우개 달린 끝을 그렇게 흔들거리며 글씨를 써 본 적이 그 이후에는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지우개 달린 연필은 그다지 좋아한 적이 없었다. 왠지 연필심이 사각거리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지금은 연필호 기록을 해도 어차피 옮겨야 할 것이니 나중에 종이에 흑연이 번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기록 자체를 노트에 하고 말 때와는 다른 장점이다. 쓰고 싶은 글이 생기면 손으로 쓰고 말았을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볼펜이나 만년필을 사용했다.
만년필로 글을 쓰면 왠지 허리를 뒤로 꼿꼿이 세우고 고개도 뻣뻣하게 하고 책상을 내려다보면서 써야 할 것 같다. 책상도 마치 사장 집무실처럼 알 수 없이 권위적이 된다. 그렇게 쓸 게 아니라면 굳이 만년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니 글씨도 점점 커지고 여백도 많아진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통 중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공책 정도는 되는 크기에 미리 줄이 가 있는 노트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펜을 세우고 글씨를 쓰게 되는데 그게 만년필 촉에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볼펜도 샤오미 볼펜이나 캐멀 볼펜 등을 사용해 보았는데, 지금도 딱히 나쁘지는 않다. 0.28mm짜리 볼펜은 책 여백에 필기를 하거나 오타를 수정할 때만 사용하고 노트에 글을 쓸 때는 조금 더 굵은 것을 사용한다. 노트의 페이지 전체를 계속해서 파악해 가며 읽을 필요 없이 몸을 움츠리고 내가 지금 쓰는 그 줄만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며 쓰는, 보통의 메모에 딱 알맞다.
이번 여행 중에는 어쩔 수 없이 수첩과 함께 길이가 짧은 볼펜을 구입했다. 가격대와 이런저런 것을 비교한 끝에 고른 것이다. 짧고 가늘다. 그리고 옆으로 돌리면 심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판촉용으로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것이 많다. 그렇게 구입한 수첩을 왼손으로 잡고 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자세로 글을 쓰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외로 중독될 만했다. 그게 그렇게 집중이 잘 되는 자세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해도 제대로 전달이 될지 모르겠지만, 전에는 정식으로 글을 쓰는 자세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 마치 붓글씨를 쓰듯이 천천히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허리도 굽히고 눈도 지금 글자가 쓰여지고 있는 그 어절, 단어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머릿속에 들어가는 시각적인 요소들이 줄어들어서인지 글을 쓰는 속도도 약간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키보드를 사용해서 글을 쓸 때에는 어쩔 수없이 예전과 달리 취할 자세가 없기는 하다. 그러나 손글씨에서만은 적어도 뭔가가 개선된 셈이다. 이 자세는 숙소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수첩을 들고 글을 쓰다가, 우리나라에 돌아와 KTX에서 식탁을 펼치지 않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글을 쓰다가 발견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쓸 때는 펜도 짧은 편이 좋다. 대충 잡고 쓰는데 필기구가 길면 그 휘둘리는 끝에 자꾸 눈이 가게 된다. 그 짧은 볼펜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노트에 연필로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연필은 어쩔 수 없이 벌크로 구입한 탓에 모두 하나같이 뒤에 지우개가 달려 있다. 그리고 네 자루를 가지고 다니는데, 연필을 가지고 다니기 위해 구입한 필통에는 그 길이 때문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팔통은 어느 정도 연필을 소모해서 짧아지면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짧은 볼펜을 사용하니 글이 더 잘 써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연필들을 다 버릴 필요는 없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작업을 하나 했다.
프라이어를 가지고 와서 꽉 조이는 부분이 아닌, 꼭 잡도록 톱니모양으로 된 곳에 연필의 지우개가 고정되는 금속 부분을 넣고 조이면서 비틀었더니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지우개가 분리되었다. 가지고 다니던 것이 네 자루밖에 되지 않아서 1분도 되지 않아 모두 분리를 했다. 그리고 지우개가 있던 부분도 뾰족하게 새로 깎았다. 이제 연필을 양쪽으로 쓰게 될 것이다. 일단 지우개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연필의 길이가 확 줄었다. 이제 필통 안에서 흑연 가루가 잔뜩 굴러다니지 않도록 연필 뚜껑만 잘 꽂아서 다니면 된다. 가지고 있는 모든 연필에서 지우개를 분리할까 하다가 놔두었다. 어차피 꺼내어 새로 깎을 때마다 해도 좋을 일이다. 당장 쓸 것도 아닌데 망가뜨려서 보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 여행에서 적어온 글들을 다 옮겨서 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행에서 구입한 수첩과 볼펜을 어느 정도는 사용하고 나서야 연필도 사용할 것이다.
수첩을 쓰는 방식에서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수첩에서 글이 잘 써지는 쪽은 오른쪽 면이다. 제본된 방향에서 바깥쪽으로 글을 쓰게 되기 때문에 수첩을 잡고 쓰기에는 항상 좋다. 글씨가 이상하게 삐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본된 가운데 부분을 눌러가며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른쪽 면에만 글을 쓰기로 했다. 왼쪽 면은? 오른쪽 면만 사용하다가 뒤표지에 닿게 되면 수첩을 돌려 뒤표지를 앞표지로 사용하게 되면 또다시 오른쪽 면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아마존에서 구입한 체스 문제집 하나가 이렇게 되어 있었다. 한 번에 다음 면의 힌트까지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편집을 한 것 같은데, 수첩은 내가 글을 쓰는 데 혼자 임의로 정해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못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을 쓰는 스타일은 변할 것이다. 글의 스타일도 변해갈 것이고.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도 재미인데, 그 재미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재미들이 있는 것은 선물이다. 내 글을 내가 쓴다는 점에서 즐겁고 내 글을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도 즐겁다. 그리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나름의 맛이 있으니 글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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