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쓰기가 좋다. 좋은데,

by 루펠 Rup L

모든 사람은 항상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특히 안정에 대한 욕구는 욕구에서 끝나지 않는다. 너무 간절히 원하면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믿는다고 비웃으면서 그것이 어떤 정신적인 작용인 것처럼 말하기 쉽지만 너무 흔해서 그렇지 안정에 대한 욕구가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가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가정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 종류가 아닌 것처럼 간과하기 일쑤다.
내가 글을 쓰는 도구는 계속해서 변해왔다. 연필로 쓰다가, 볼펜을 쓰다가, 만년필을 쓰다가, 컴퓨터를 쓰다가 등등. 그렇지만 단언하건대 단 한 번도 의도적으로
'이런 방법으로도 한 번 글을 써볼까?'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언제나 우연히 새로운 방법을 접하고는
'이렇게 글이 잘 써지는데 왜 이 방법을 진작 사용해보지 않았을까? 이제부터는 이 방법만 써야겠다.'
라고 생각하기만 했다. 그러다 다른 방법을 찾으면 또 죽을 때까지 그 새로운 방법으로만 글을 쓸 줄 알았고. 그래서 집에는 연필 육십 자루와 고무줄 달린 수첩 다섯 권이 쌓여 있는 것이다. 그전에 사다 놓았던 이런저런 종류의 볼펜 여덟 자루씩도 있다. 여덟 자루인 이유는 그래도 한동안 꾸준히 사용해서 두 자루씩은 잉크를 다 썼기 때문이다. 수첩의 경우에는 오래전 손글씨만 쓸 줄 알았을 때 한 번에 알리에서 주문해서 온 것이었고, 그 당시에는 빠른 배송은 없었기 때문에 이미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쯤 되어서야 도착을 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잘 아는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리지는 않고
'지금은 컴퓨터로만 글을 쓰지만 그래도 수첩은 새것인데 버리기도 그렇고 만에 하나 나중에 수첩을 쓸지도 모르니까 그냥 놔두자'
고 생각하고 책꽂이 어딘가에 잘 욱여넣었던 것인데 몇 년 지나긴 했어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사용하는 수첩을 다 쓰면 다시 집어 들게 될 것이니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글을 쓰던 경험을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은 발명은 아니고 단지 발견일 뿐인데, 전보다 글을 잘 써지게 하는 수단으로써의 필기구는 실제로 그 방법을 사용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생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의외로 연필로 글이 잘 써지더라, 하는 건 글을 써 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상태에서는 의외일 것이다. 연필이 번져서 볼펜으로 써 보는데 보통은 안 되었는데 이 볼펜으로는 잘 되더라, 하면 그것 또한 새로운 아이디어이다. 그 볼펜의 굵기나 써지는 느낌으로 비추어 보면 만년필이 괜찮은 것 같다,라고 하면 그것도 새로운 시도를 해서 발견한 사실이다. 시도를 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지만 그 시도가 언제나 성공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말로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방해하지 않는 도구를 찾아보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글은 글대로 쓰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필기구를 사다가 시험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초안 비슷하게 수첩으로 글을 쓰고 그것을 나중에 옮겨 적는 것은 가장 마지막, 최근에 나온 방법이다. 옛날, 몇십 년 전에도 손으로 글을 쓰고 타자기로 옮겼다는 말이 많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맥락이다. 그때는 타자기로 쓴 것은 수정이 힘든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옮겨 적으면서 이미 손글씨로 완성 상태의 글을 만들었을 것이다. 타자기로는 최종본이고 말이다. 지금은 컴퓨터로 옮겨야 오히려 편집이 쉬워진 시대이다. 그러니 엄밀히 두 단계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셈이다. 이것은 나중에 자동차가 발명되고 나서는 고속도로에서 전국 어디든 빠지기 쉬워진 것과 달리 빠르다고 할 만한 교통수단이 철도밖에 없을 때는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확하게 정하고 타야만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전에 수첩에 글을 쓸 때는 이분법적으로 손글씨와 컴퓨터 파일로만 구분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손으로 글을 쓰면서 생각을 다듬고 컴퓨터로 완성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떠올리지 못한 것이 신기한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써봤자 누구에게 보여줄 게 아닌 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에게 보여줘도 되겠다 싶은 글은 올리고 싶은 곳에 올릴 수 있다. 블로그도, 브런치도. 그럴 만한 글이 아니면 수첩에 남은 글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시절에 수첩에 쓴 글은 혼자 다시 읽으려고 쓴 글과 누군가에게 보여줘도 될 만한 글 사이에 구분이 전혀 없다.
사실은 이것도 고민이다. 요즘 몬테네그로에서 구입한, 수첩과 볼펜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그전에 사다 놓은 연필들이 무색하게 가느다란 볼펜으로 글이 제법 잘 써진다. 그래서 또 가느다란 볼펜을 알리에서 찾아보았다. 3,000원에 10자루. 저렴한 가격을 보고 상상하는 그대로이다. 조만간, 예전에 수첩을 주문했을 때보다 훨씬 더 일찍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는 볼펜이 다 되면 바로 이어서 쓸 수 있을 텐데, 과연 연필을 쓸 기회가 있을까. 연필과 볼펜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현재 수첩에 글을 쓰고 그것을 키보드로 옮기는 형태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죽을 때까지 내 최후의 방식으로 남으면 좋겠다. 효율성이든 뭐든 필요 없이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카페나 기차나 버스나 상관없이 집중이 매우 잘 되기 때문이다. 옮기는 것은 손으로 글을 쓴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런데 한 가지 문제라면 그것이 제법 귀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글쓰기에 대해 한 편, 소설도 한 편 썼지만 완성을 했다는 것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면서 아직 한 번도 다시 펴보지 않았다.
글을 쓰고 나서 보통은 내버려 둔다. 끝을 맺지 못한 글이라도 키보드로 옮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어서 끝을 맺을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 쓴 글도 그냥 내버려 둔다는 점이다. 그리고 옮겨 적거나 하게 되면, 즉 그 글이 그 자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스(출처)가 되고 나면 그 글에는 엑스표가 쳐진다. 그런데 엑스표가 없는 글이 쌓여가면 손으로 쓴 글씨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석해 가면서 읽어야 무슨 글인지 알게 된다. 다시 읽어 보고 지금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키보드를 가지고 오는데 손으로 쓴 글이 쓴 지 오래되어 내용을 짐작할 수 없어진 상태에서 다시 읽는 일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소설가나 글 쓰는 것이 주 업무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것보다는 새로 쓰는 것이 더 재미있다 보니 마치 영어로 된 글을 읽을 때처럼 띄엄띄엄 읽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냥 페이지를 넘겨서 새로운 글을 또 쓰게 된다. 그러면 옮겨 적지 않은 글이 수첩 한 권, 두 권 쌓여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다섯 편뿐이다. 두 권은 매우 고차원적인 비약이긴 하다. 그렇지만 약간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무조건 많이 써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쓴 글을 다시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 건 게으른 것이니까. 게으름은 보통 발전을 가로막는 법이니 다시 읽어보는 것은 발전에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옮겨 쓰는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사슬이 끊어지는 것이다. 같은 글만 주구장창 쓰면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제야 이해가 되는 일이기는 한데, 이유도 모르고 고민만 하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던 것이, 고민의 이유가 내가 그 자리에 지체되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발전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왔다. 뭐, 그 노력을 비웃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노력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는 건 비웃음 당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열심히 사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처지로 만들려고 손발을 휘젓는 물귀신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옆에서 보기에 눈에 띄게 발전을 한다,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은 평소에 그렇게 남들 눈에 보이게 아등바등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뭔가 듬직하게 계단을 오르듯 차근차근 나아가기만 하는 느낌이었지. 나는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내가 가는 방향이 뭔가 하는 척하기 좋은 방향이 아닌, 정말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기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공책과 만년필과 수첩과 볼펜과 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