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4., 이스탄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을 때 이것을 가지고 수첩에 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키보드로 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속도의 차이뿐인 것은 아니다. 키보드를 사용하면 글을 쓸 때 편한 정도만 다를 뿐 글을 월등히 더 빨리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마음의 상태가 다른 것 같다. 순전히 심리적인 요소인지 신체적인 요소인지는 모르겠다. 신체적인 요소로,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양손을 쓰지만 손글씨를 쓸 때는 왼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첩을 붙들고 있을 뿐이라던가, 한 줄이 다 차고 나면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자동으로 다음 줄로 넘어가지만 손으로 글씨를 쓸 때는 내가 아랫줄 맨 앞으로 손을 옮겨서 계속 써야 한다거나, 한 페이지가 다 차면 종이를 넘겨야 한다거나 하는 행동의 차이와, 화면상에 인쇄된 깨끗한 글자와 나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글씨체의 차이 등이 있다.
둘 중 어떤 것이 특별히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쪽에서 더 나은 글이 나오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걸 알 정도로 많이 써 본 것도 아니고, 어느 쪽이든 내가 많은 사람이 읽고 판단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 쓰는 글은 손글씨이다. 어차피 다시 컴퓨터로 옮기겠지만 그때도 차이를 느끼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갑자기 떠오르는 다음과 같은 글도 그 자체로 나 자신에게 주고 싶은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 "우리가 요즘 애들한테 맞춰야지 어쩌겠어. 물가가 오르는 만큼 월급이 안 오른다는데 애 낳으라고만 하면서 귀 쳐 막고 말도 안 들어주면 나 같아도 몬살지."
"그러게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게 주류였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겠죠."
그녀의 맞장구 아닌 맞장구에 한여사는 마음이 편해졌다. 좋은 사람을 만나 황혼 결혼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또 한편으로 계속 붙들어 두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에게는 확신이 없이도 마음에서 걱정이 덜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모든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고 모든 사람들의 숨과 존재에는 의미가 있다. 그 의미 자체가 그 사람의 가치이고 그것을 일일이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 생명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 이것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인물들도 마찬가지여서 금세 잊어버리고 말 수는 있지만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대화를 저렇게 적어놓고 다시 읽으며
"존재할 필요도 없는 인물이야, 이런 소리만 하다니."
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주가 미래를 향해 모양이 드러나듯이 우리 인생의 모양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드러날 것이다. 그때까지 파악하지 못한 의미는 아쉽지만 '파악되지 못한 의미'일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들을 가지고 잘 짜놓은 직물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른다. 실제로 마주치는 사람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화나 책에서 만나는 엑스트라나 모두 우리에게 지혜를 짜도록 도움을 주는 요소인 것은 똑같다. 그러니 모두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손글씨로 나오는 친구도, 키보드로 찍어내는 친구도, 현실에서 만나는 친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