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 내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또는 인터넷으로라도 글다운 글을 읽지 않으면 나는 글을 쓰지 못한다. "내" 경험 상 "나"는 그렇다는 뜻이니 당연히 읽는 것이 전혀 없어도 많은 것을 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글이 아니라도 읽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영화나 음악이나 혹은 생활의 소소한 사실들조차 말의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류에는 끼지 못하는, 눈앞에서 뭔가를 말의 형태로 풀어내 주는 것을 읽어야만 비슷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지 않으면 굳이 생각을 말의 형태로, 문장으로 에너지를 써 가며 만들어낼 필요성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할 뿐, 엄밀하게 말해서 능력이 없는 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글이 나오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는 그냥 쓸 수 있다, 없다의 단 두 가지 경우로 귀결되는 것이니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내가 글을 쓸 때, 혹은 직전에 읽는 글은 약간 공업적인 성격도 있고 농업적인 성격도 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공업적인 성격은 재료의 측면, 농업적인 성격은 형태의 측면이다. 이 두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에야 내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글. 굳이 남의 글일 필요도 없고 내가 과거에 쓴 글이라도 상관없다. 그냥 마중물 같은 거니까.
다른 글이 공업적으로 내 글에 기여한다는 것은 어떤 글이 내 머릿속에서 분해되고 최소한의 단위가 되어 받아들여지면 그 글에서 다룬 소재가 다시 내 글의 소재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철광석이 철판이 되어 나오듯 자연 상태의 것을 전혀 다른 모양으로 가공한다기보다는 부분적인 재활용에 가깝다. 단 그 소재가 항상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다. 유리병을 녹여 다른 유리병을 만드는 것처럼 완전히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예시로 쓰이거나 그 소재가 다른 생각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를테면 유리병을 녹인 것이 단추의 유리 코팅이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농업적인 부분은 조금 더 비유적이다. 한 사람의 글을 너무 오래 읽다 보면 내 글에서도 생각을 풀어가는 방식이 닮아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모든 배경은 소재가 자라날 토양 같은 것이고 말이다.
공업적인 부분, 그러니까 소재는 농업적인 부분에서 잘 뿌려놓은 거름 위에 씨앗처럼 뿌려진다. 여기부터는 농업도 공업도 아니다. 그 씨앗이 글이 되어 자라는 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내가 쓰지만 어떻게 쓰여지는 건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생각이 어떻게 펼쳐지는 건지, 왜 어떤 때는 처음에 생각했던 방향으로 글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어떤 때는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가는지 알지 못한다. 고등학교 때는 화자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청자에 맞추어 개요를 작성하고 글을 쓰라고 배웠지만 어차피 내가 쓰는 글은 그런 글이 아니다. 그런 글도 필요할 때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노트와 대화할 땐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쓴다면 그건 글을 쓰기 위한 글쓰기이다. 누구도 재미있어하지 않고 심지어 그 글을 쓴 나조차 다시 읽고 싶어 하지 않을 글이다. 물론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글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쉬운 문제다. 그냥 오며 가며 짧게 대화하는 자리마다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하면 답답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 매일같이 들어주고 싶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게 있어 내 글도 나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내 글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대화의 모습을 닮았다.
그럼에도 다른 글이 배경에 있어야 한다는 점 자체가 무척 재미있다. 웅성웅성거리는 교실에서, 시골 장터에서 대화가 더 편하다는 점과 얼마나 비슷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