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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파운데이션 전집을 읽고

by 루펠 Rup L

역사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계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자면 끝이 없어진다. 보통은 계기라는 말이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조건을 아우르기보다는 도화선이 되는 특정한 어떤 다른 사건만을 가리키는데, 사실 그 사건은 환경과 조건이 잘 맞지 않았다면 전혀 도화선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니 일정한 상황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 상황과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마침내 우리가 역사적인 사건이라 부르는 그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이 차곡차곡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역사에서 "계기"라는 말이 실제 그 일이 일어나게 된 해당 상황을 향해 가도록 몰아가는 환경이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시한 채 마지막 방아쇠만 기계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가 홍수로 인해 떠내려 가다가 이미 나뭇가지들이 잔뜩 걸려 있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다리>에 도착해 요행히 나뭇가지들 사이로 간신히 물이 빠지고 있는 그곳을 틀어막아 마침내 <절대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무너뜨리게 되면, 홍수와 그전부터 차곡차곡 쌓인 기존의 나뭇가지들과 물의 압력 등 수많은 요인은 무시하고 마지막에 도착한 그 나뭇가지만 가리켜 <절대 무너지지 않는 다리의 절대성을 파괴한 마법의 지팡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아무도 실생활에서는 사건을 그런 식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역사를 소개하는 데 부담이 커서인지 역사에서는 이런 식의 요약을 종종 보게 된다. 하긴, 역사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외교, 정치분야 뉴스만 보아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무시한 자잘한 사실들 때문에 평가가 뒤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실 이런 것은 상식의 영역이다. 역지사지는 어릴 때부터 귀에 피가 나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적용하는 것도 힘든 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에 대해 적용하는 건 더 힘든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에 있지 않은 사람뿐 아니라 눈앞에서 글로만 접할 수 있는 뉴스의 주인공이나 대상 국가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얼마 전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읽었다. 하나의 장대한 역사서였다. 한 인물의 입장에서 시작해 그 인물의 이상의 끝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펼친 영화 같은 소설이었다. 아마 듄 역시 읽으면 비슷한 느낌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실제 역사가 아닌, 소설에 불과한 천년의 설명이지만 내가 그 소설 밖에 있는 덕분에 그 소설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절대 알 수 없는 속사정들을 알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안의 사람들도 하루하루를 교통사고가 나거나 병으로 고생을 하거나 그 밖의 이유로 예상보다 일찍 죽지 않는 것에 안도하고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존재들이다. 은하계의 2만 개가 넘는 행성에 퍼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니! 그들이 지금 이 우주에 실존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책을 떠올릴 땐 언제나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파운데이션을 읽었을 따름이지만 내게 떠오르는 그 우주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파운데이션을 쓰면서 떠올린 그 우주와 다른, 엄연한 내 우주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큰 방향과 사건들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설명한 대로일 뿐이지만 한 가지 설명으로 만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듯이 백 명이 그 소설을 읽는다면 하나의 설명서를 참조해 구축한 백 개의 다른 우주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그 소설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다. 그 우주는 그 우주이고, 내가 살아가는 이 우주에서는 내가 이 은하, 아니 이 지구, 아니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그 책 속에서 마침표가 차지하는 만큼의 비중이라도 내 주위에 대해 파악을 했나 싶은 생각에서였다. 수많은 의지와 우연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역사와 엄연히 지금 이 순간 인류가 만들어 가고 있는 정치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내가 몸담고 있고 빠져나갈 수 없는 이곳을 더 열정을 갖고 읽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아직 이 부끄러움은 막연하다. 막연하다는 점을 빼면 3년 전의 그 책과 비교될 정도이다. 그 책이라 함은 <알렉산더 해밀턴 평전>인데, 그 두꺼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부끄러움은 전혀 막연하지 않았다. 그 책을 읽느라 주말 내내 매달려서 4일이 걸렸는데,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은 미국의 기틀을 잡은 사람이다. 미국 정부의 조직조차 그가 짜 놓은 대로 세계대전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살아온 것처럼 살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을 써 놓기만 한 책을 읽는데도 며칠 동안 끙끙거렸으니 다 읽고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파운데이션은 그나마 가상의 역사라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은 없었다. 대신 뭔지 알 수 없는 찝찝한 부끄러움이 있다. 막연한 부끄러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찝찝함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에 너무 집착한다. 그리고 그렇게 도식화하고 나면 그 도식만 남기고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다. 그런데, 그 도식이 언제나 성립하는 게 아니라면 그 도식에는 빠진 것이 분명 있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 우리가 그 도식을 만들어 머릿속에 보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도식에 빠진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홍수에 떠내려온 나뭇가지와 다리, 그 두 가지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셀던과 파운데이션' 이런 식으로 파운데이션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은 더욱 복잡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침략당한 쪽이니 우크라이나는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한 적도 있고 우크라이나 외교관들의 무례로 국민들이 당황하고 실망한 적도 있다. 이스라엘도 영원히 피해자 자리에 있지 않다.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우리가 너무 게으른 것인지도 모른다. 수학에 관심이 없으면 수학 공부에 게을러질 수밖에 없듯이 천년 우주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역사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그렇게 그윽한 눈길로 인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현실에서도 갖기를 바라며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사실 이것도 없는 패턴을 있다고 착각하고 찾다가 결국 억지로 끼워 맞추는 지경에 이르면 금세 음모론으로 빠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심지어 단순히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것뿐일지라도 얼마나 열심인지.
또다시 문제는 균형으로 돌아온다. 뭔가 있을 테지만 눈을 감는 것,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덥석 음모론을 믿는 것 사이의 균형. 다행히 유사 답안이 있다. 바로 책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니까 이런 답을 얻었겠다 싶기는 하지만 단순한 논리다. 삼국지나 파운데이션을 읽는 딱 그만큼만 현실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다. 제법 쓸만한 결론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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