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상자

안갯속에서

by 루펠 Rup L

현수는 담배를 물고 입으로 숨을 후욱 들이마셨다. 담배에 불을 붙이기 전의 습관이었다. 아내는 항상 담배를 끊으라고 성화였지만 책이 팔리기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고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하고 나서는 서재에서 담배를 피워도 크게 뭐라 하지 않게 되었다.
현수에게 담배를 물게 한,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심지어 그런 걸로 이야기가 될까 싶을 정도였지만 아이디어는 써도 밑져야 본전이니 떠오르는 대로 쓰는 게 나았다.
따지고 보면 이제껏 성공적이었던 글 중 현수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건 하나도 없었다. 작가가 백 명이면 글 쓰는 방식은 천 가지라더니 그 역시 처음부터 결론까지의 대략적인 개요를 잡고 쓸 때도 있고 첫 문장이 매력적이어서 일단 연필부터 잡고 그 뒤로는 써지는 대로 쓸 때도 있었는데, 어쩌면 글 쓰는 방식 자체가 아니라 아직 두 가지 방식밖에 모르고 달려드는 것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그날 해가 떠오른다는 것을 느꼈던 그때는 그가 아직 안갯속에 있을 때였다. 왠지 공기가 따뜻해진다는 생각은 했지만 온통 하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설산에서 안개가 밝아진다는 정보는 뇌에는 그다지 쓸모 있는 종류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타자기로 타자를 쳤다. 그리고는 생각이 그 또렷한 글자들 어딘가의 막다른 골목에라도 몰린 것처럼 노려보다가 종이를 뽑아서 다시 한번 읽고 불붙지 않은 담배를 두 모금 더 들이마셨다. 서랍을 열고 묵직한 볼펜을 꺼내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타자기로 친 문장 뒤에 이어서 글을 썼다.
<그는 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들렀던 카페를 기억해 냈다. 요즘의 가벼운 분위기, 모던이라며 꾸민, 획일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뭔가 똑같은 느낌의 카페들과는 다른 묵직한 느낌의 카페였다. 두꺼운 테이블과 무거운 의자, 대체적으로 무거운 색깔의 가구들과 벽, 정장 차림의 오십 대 바리스타의 재빠른 손놀림, 그리고 무엇보다 위스키 향이 더 자연스러울 듯한 어두운 실내. 기억이 거기까지 이르자 카페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아침에 안개가 끼면 부지런히 움직이면 됩니다.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면 싹 사라질 거예요. 하지만 낮에 안개가 끼면... 대책이 없지요."
그러나 그 이후로는 기억이 온전히 나지가 않는다.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싸고 출발을 하려고 한 것까지는 부분 부분 기억이 나는데 출발한 기억은 없다.>
드디어 현수는 볼펜을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머릿속에서는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현수만큼이나 그 남자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었다.
현수는 한때 글을 쓸 때마다 술을 마셨다. 그러다 갑자기 술을 끊었다. 친구 때문이었다. 동창 중 유일하게 서울에 가서 젊어서 성공한 친구. 동네에 플래카드가 내걸렸을 때를 생각하면서 현수는 담배 연기를 후욱, 하고 내뱉었다.
<연세대 합격, 대경리의 자랑 최영성>
그 친구가 대학으로 훌쩍 떠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귀퉁이가 찢어졌는데도 경찰도, 아무도 떼자고 하지 않던 플래카드였다.
그 친구의 성공 비결은 술이었다. 대학원에 가면서 한 번 마을로 내려온 그는 그리 크지는 않은 마을 잔치를 마련했다. 거나하게 취한 그는 잘난 체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졸업 후 곧바로 대기업에 취직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때 밝힌 공부와 성공의 비결이, 계획을 무리하게 짜고 소주 두 잔을 마신 후 진짜로 그 계획대로 해 버리는 것이었다. 현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등학교 때 옆에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었다.
현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기구를 수리하면서 살았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틈틈이 글을 썼지만 모두 취미일 뿐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담배를 무는 습관이 든 이유였다. 일을 하다가 쉴 때면, 군대에서건 돈을 벌 때건 담배를 입에 물었는데, 그 쉰다는 것이 그에게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수가 여기저기 글을 보내기는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출판사에서 상을 주겠다고 연락을 받고 찾아가서 보니 몇 년 전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녀석이 다니는 곳이었고 얼떨결에 상을 받고 계약을 했지만 나중에 실제로 자신의 이름이 찍힌 책을 받았을 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사십 대가 되도록 현수는 현수였지 작가 현수가 아니었다.
현수가 글을 쓸 때 술을 마시고 해 볼까 하고 생각한 것은 오십이 막 넘었을 때였다. 쉰둘이 되고, 이제 좀 제대로 된 걸 써야 서재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가 더 이상 하루 종일 기계를 만지지 않고(한두 시간씩 취미 삼아 가보기는 했다.) 서재에 틀어박혀서 돈을 벌었지만(마을 사람들이 보기엔 그랬다.) 그래도 현수는 그저 현수였기에 오히려 편했다. 현수도 마을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현수 vs 글>의 구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노려 보려고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해 본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건 한 달도 채 가지 못했다. 술을 마시고 책상에 앉으면 스토리가 갑자기 흐느적거리면서 현실과의 경계가 사라졌다. 현실과 이야기는 떨어져 있어야 문장의 형태로 만들어도 그 뼈대를 유지하게 되는데, 현실과의 경계가 사라지자 이야기의 시간도 현실의 시간과 함께 흘러가 현수 자신이 그 내용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도 전에 이야기가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천을 덮어 천막을 완성해야 하는데, 천막을 지은 사람이 바로 그 뼈대인, 그래서 쉬려고 누우면 천막도 곧바로 무너져 버리는 신세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것이 실제로는 천막과 달리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애초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소재들을 헛되이 떠내려 보내며 그 친구의 방식이 자신에게 잘 들어먹지 않는 이유가 뭔지 고민만 거듭했다.
그 와중에 출판사에서 선물로 타자기를 주었다. 이것은 정말로 선물이었다. 타자기로 글을 시작하면 이야기의 첫 부분을 마치 비석을 세우듯 고정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술을 마시면 반페이지 이상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술 없이 타자를 치자 예전보다는 나아진 느낌이었다. 술기운만 잘 타면 더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은데 그 조율의 기술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물이 하나 왔다. 연하장 사이즈의 카드를 연중에 받는 건 처음이었다. 보내는 사람에는 처음 보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받는 사람 란에 인쇄된 것은 주소도 이름도 틀림없이 현수의 것이었다. 주소가 조금 틀리기는 했다. 지금 사는 집은 어렸을 때부터 살던 집 뒤에 새로 지었으니까. 그래도 어차피 지금 그 집에는 부모님이 두 분 다 살고 계시니 그 정도 차이가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소꿉친구였던 아내도 몇 걸음 못 간 거리에 친정이 있었다.
우편물 봉투를 뜯자 역시 연하장 같은 카드가 나왔지만 꺼내보니 부고장이었다. 최영성. 최영성. 연세대 그 놈인가? 한서그룹 들어간다고 했던 그놈? 아랫부분엔 자식들로 보이는 이름들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현수가 전화를 걸자 얼마 안 되어 눈이 퉁퉁 부은 모습이 떠오르는 잠긴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알코올 중독으로 치료를 받고 계셨는데 간암이셨습니다."
그날로 마을에서는 한동안 술이 끊겼다. 몇십 년째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고장을 받은 모양이었다.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아침,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반주를 들이켜는 사람이 늘 몇 명은 있던 식당에서도 술 없는 식사가 며칠 동안 이어졌다. 현수도 더 이상 술을 마시고 글을 써 보려는 시도를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술을 마시려고 할 때, 그 리듬대로 불붙지 않은 담배를 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현수의 소설에서 조난당한 줄도 모르는 조난당한 그 사람은 조난당한 줄 몰랐기에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헤매다 어느 순간 철조망을 마주하게 되었다. 철조망의 의미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던 그는 안개 틈으로 최대한 모든 사물을 하나씩 구분하려고 애를 쓴 끝에 그 철조망 너머 1~2미터 떨어진 곳에 제대로 된 등산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등산복이 찢겨 가면서 철조망을 뚫고 길로 들어선 그는 그곳이 자신이 올랐던 그 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도 작가가 되려고 된 건 아닌데 정신 차려보니 평생을 하던 일보다 낫다는 걸 발견했지.'
그제야 현수는 어째서 일상이 어색할 때가 있는지 깨달았다. 우리는 안개 낀 산을 오르는 중인 것이다. 학교에 다닐 때도, 농기구를 웬만큼 뜯어봐서 고장 난 증상만 보면 어디가 이상인지 대략 머릿속에 그려졌을 때도, 출판사 사무실에 길을 물어 가며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도, 심지어 지금도 서재에 들어설 때마다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어색함이었다. 오르막은 늘 힘들게 마련인데 우리는 심지어 안갯속에서 길이 아닌 곳으로 가 보기도 하고 때로는 남들 다 가는 길만 따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남들 다 가는 길이라고 해서 안개가 끼지 않는 건 아니다. 모두 다 똑같이 보이지 않는 앞을 더듬으며 단지 옆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을 뿐이다. 똑같은 사물도 눈앞에서 보이는 것과 안개가 걷히기 전에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확신과 어색함의 측면에서 꽤나 다르다. 현수가 불붙은 담배를, 연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숨을 내뱉는다. 이것은 차라리 한숨이다. 오후의 햇살을 받고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현수의 눈앞에서 흐느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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