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상자

꼬마

by 루펠 Rup L

검고 네모난 모양으로 생긴 꼬마가 친구들과 함께 산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꼬마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인식했을 때쯤 친구들도 모두 스스로를 어떤 존재라고 막연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다 같이 하나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점, 모두 같은 네모이지만 표정과 느끼는 방식은 다르다는 점, 우리는 딱히 무언가를 섭취하고 깨달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그냥 이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만족스럽다는 것 정도였다. 다 같이 서로 좁은 공간에 부대끼고는 있었지만 딱히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상태’만 유지한다면 아무도 불만도 없었고 역시나 아무도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흔들렸다. 물리적으로 흔들렸다는 뜻이다. 그러자 가장 밑에 깔려 있던 꼬마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꼭 밑에 있지 않더라도 다른 꼬마들과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들은 자신들을 긁는 다른 꼬마들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다 흔들림이 줄어들자 그들도 금세 조용해지고 평화로운 만족감에 바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잠시 후 갑자기 빛이 들어왔다. 검은 꼬마들은 스스로가 까맣긴 하지만 어둠 속에서 인식한 것처럼 완전한 까만색은 아니고 조금 진한 회색에 가까울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모두들 표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한 검은색의 무늬였다. 잠시 후 자기들끼리 뭉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뭉쳐 있는 게 아니라 투명한 비닐 속에 갇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두 손이 비닐을 한 번에 찢어버린 것이다. 두 손은 비닐을 찢은 후 거꾸로 들고 흔들어 안에 든 꼬마들을 바닥에 쏟았고 꼬마들은 또다시 서로 부대끼면서 갖은 비명을 다 쏟아냈다. 몇 초 되지 않은 시간 후 다시 온 사방이 조용해졌다. 꼬마들 외에는 아무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잠시 후 꼬마들 옆에 커다란 판이 나타났다. 그 판은 또다시 다른 판과 겹쳐지고, 겹쳐지면서 딸깍 소리가 난 후 다시 다른 판과 합쳐졌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는 다른 판이 겹쳐지고 또다시 딸깍 소리가 나면서 다른 편이 겹쳐졌다. 그리고 납작하긴 하지만 판은 아닌 다른 것과 겹쳐진 후 이번에는 네 귀퉁이와 그 사이에 16개의 나사가 박혔다. 꼬마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꼬마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것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보자마자 달려들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 판이 뒤집어지자 수많은 요철들이 보였다. 선택받은 꼬마들이 그곳을 하나씩 차지했다. 꼬마 Ctrl은 선택받고 오른쪽 스페이스바 근처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함께 있던 꼬마들 중에 Ctrl이 셋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둘이 선택되어 꽂히고 자신은 비닐 속에 다시 들어갔다.

비닐 속의 삶은 아주 평화로웠다. 선택된 꼬마들이 부럽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본능 때문이고 여기도 나쁘지 않았다. 모두들 같은 처지의 꼬마들 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풍경 속에 고요하게 평화를 누렸다. 이렇게 있으면 서로 동질감만 느낄 뿐 싸울 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솔직히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그저 고요한, 사물들만의 세계를 지난 후 다시 비닐이 꿈틀거렸다. 다른 꼬마들은 또 서로 몸이 닿으면서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질러 댔다. 손이 비닐 한가운데를 휘젓고 있었다. 무서워서 손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자기 몸에 닿는 다른 꼬마에게만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다 꼬마 Ctrl은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를 휘젓고 지나가던 손가락이 자신을 잡는 순간, 아무도 그를 향해 소리 지르지 못했다. 비닐은 다시 암흑에 빠졌지만 꼬마 Ctrl은 그 암흑을 보지 못했다.

꼬마 Ctrl은 키보드를 보았다. 드라이버가 떨어져 있었다. 키보드에 나사를 조일 때 보았던 드라이버였다. 그리고 스페이스바 왼쪽의 Ctrl 꼬마가 처참하게 깨져 있었다. 상황은 명확했다. 드라이버가 떨어지면서 Ctrl에 맞았고 불쌍한 Ctrl은 그대로 깨져 버렸던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Ctrl 꼬마는 깨지는 순간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다른 꼬마들이 Ctrl이 바뀌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지만 Ctrl은 요지부동이었다.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키보드에 선택받아 간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꼬마 Ctrl은 점점 흥분에 빠져들었다.

딸깍.

키보드에 닿는가 싶더니 그대로 키보드의 일부가 되었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여기도 사물의 세계이다. 햇빛은 들었다 나가고 조명도 켜졌다 꺼질 뿐, 이제 다른 꼬마들과 몸이 닿을 일도 전혀 없으니 비닐 속에 있을 때보다 더더욱 사물의 세계에 빠진 게 아닌가 싶었다.

오해였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와 무언가의 일부인 상태를 둘 다 겪어보지 못했기에 동일하리라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5일이 지났다. 그는 5일이 지난 것을 알고 있다. Ctrl은 이제 더 이상 꼬마가 아니다. 스스로 꼬마라고 느끼지 못한다. 키보드의 다른 키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키’ 보드의 키들이지 꼬마들이 아니다. 꼬마들은 비닐 속에서 언제가 올지 모를, 희망도 아닌 가능성만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자신만의 평화로운 시간이라 생각하면서 허비하고 있었다. 다시 쓰일 수 있을 때쯤에는 이미 경화되고 삭아서 버려질 것이었다. 그냥 그 상태로 있다가 죽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부딪히며 소리 지를 일이 없는 것만이 가장 평화로운 상태라고 믿었다. 하지만 키보드의 일부가 된 순간 세계는 한 번에 뒤집어졌다. 키보드를 통해 수많은 세상이 지나갔다. 수많은 문장들이 지나가며 세계가 되었다. 세계가 키보드 위를 지나가고 없던 세계가 키보드를 통해 만들어졌다. 각각의 키가 아니라 키들이 모여 만들어진 키보드라는 하나의 사물로서, 자연계 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쓸모를 만들어냈다. 혼자서만 평화로움만 있으면 되는 것은 혼자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꼬마들은 모른다. 키보드에서는 지금이 얼마나 자유로운 상태인지 안다. 묶여 있어서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다 같이 모여 하나를 이루면서 뭔가가 되었다.

외부와의 모든 자극을 거부하는, 땅 속에 묻힌 것과 똑같은 상태인 꼬마들과 달리 키보드가 사용되는 동안 그 모든 키들은 한 인간의 일부가 되어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세상을 더 큰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세상에서 들어오는 아름다운 정보를 한 인간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정리할 수 있는 머리와 손이 된다. 생명체의 일부가 되는 경험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겠지만, 무엇보다도 선택받았을 때 본능적으로 기쁨과 흥분을 느꼈던 이유는 한 인간, 한 생명체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는 것이 그 꼬마에게 있어 근본적인 존재 이유, 창조된 목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키보드는 약 7년간 사용되다가 주인이 이사 중에 떨어뜨려 두 두 토막 나면서 수명이 다했고, 거기에 있던 키들도 키보드의 용도가 사라지자 삶의 목표를 잃고 모두 무생물로 돌아갔다. 이들이 무생물로 돌아가자 주인은 비닐 속에 있던 꼬마들도 함께 버렸다. Ctrl 키는 선택받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선택받는 희귀한 경험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지만 키보드의 일부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이 자신을 누를 일이 있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힘껏 그 느낌을 불어넣어 주었다. 주인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몇 년이나 지나서, 다른 키보드를 쓰다가 문득 새 키보드의 키를 깨뜨린 것과 그 키를 바꾸면서 왠지 모를 희열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왜 기뻤을까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다가 꿈에 꼬마의 이야기를 보게 되고, 글로 쓰기로 하였다. 비닐 속에는 스페이스바도 하나 있었는데, 스페이스바는 그만큼 닿는 부위도 넓어서 키의 크기가 큰 만큼 입도 컸다. 비닐이 조금만 흔들려도 언제든 소리 지를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리 지르는 게 삶의 목적이 된 그는 오히려 쓸모가 없어졌을 때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폐기의 순간에 ‘이것도 좋은 삶이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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