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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상자

뒤꿈치와 사이다

by 루펠 Rup L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맞아, 이건 내 스타일도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어. 일이니까 해야지."
"그렇다고 해도 옷이 너무 아깝다. 다시는 안 입을 것 같은데."
"입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집에 있으면 가끔은 입지 않을까? 스타일은 바뀔 수 있는 거니까. 시도를 해보기 힘든데 이렇게 시도를 하는 게 어디야."
"그냥 입고 팔아버릴까?"
"이런 옷을 누가 돈 주고 사냐? 나 같아도 이런 행사 없었으면 누가 나눔 한다고 해도 '나눔이라는 이름의 쓰레기 처분이군'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래도 가지고 있는다고 해서 입기는 힘든데... 결국 버리게 될 것 같아."
"연두색이나 노란색이었으면 나도 그랬겠지만, 검정이면 그래도 스타일 변신을 한다고 하면 쓸 만하지 않을까?"
"소개팅할 나이 다 지나고 선 볼 나이가 되었으니 가능은 하겠네."
"청바지 입고 나가기 그럴 때 입으면 되지 않을까?"
"청바지도 검정이잖아. 웬만하면 요즘은 그렇게 소화 다 되는데 굳이 이런 옷을?"
"상갓집 가기에는 너무 가볍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에는 조금 무겁고... 그럼 이런 옷이 반드시 어울리는 일이 있겠지."
"그래, 이런 알바."
"알바 아니라도 이런데 오기에는 딱 알맞네. 더 춥거나 더 덥지만 않으면 되니까."
"우리가 문화생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입을 일이 없는 거지."
"너라도 돈을 벌었어야 했어."
"그랬으면 그놈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너만 나쁜 놈이라고 멍청하게 당했겠지. 우리 둘이니까 회사에서도 맞춰 주는 거잖아."
"그게 돈 안 받고 일 년을 버티기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이었을까?"
"음... 일단 너는 어차피 그만둘 거였으니까, 일 년 후에 돌아간다면 더 좋은 조건이 된 거고, 나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복수도 복수대로 하고 휴식도 취하니까 좋지."
"아차피 그만둘 거라는 건 그냥 해본 얘기지. 그래도 장 과장도 아르바이트하러 다니게 되는 수순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알바는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급하게 구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
"일단 오늘 외워오라고 한 건 외웠어?"
"뭐 별거 아니던데? 그냥 동선 외우고 40개도 안 되는 작품 모티브하고 걸린 시간하고 그린 장소만 외우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알바라서 아무도 물어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더 긴장되는 것 같아.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마지막 날에 갑자기 누가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대답 못한다고 생각해 봐. 일주일 동안 준비 없이 서있던 게 걸린 것처럼 될걸?"
"이것밖에 안 하는데 복습하고 계속 출근준비라도 열심히 해야지. 의심받을 걱정부터 하다니 그놈한테 당한 거 계속 이입하는 거 아니야? 그놈 생각 계속하면 너 약 다시 먹어야 할 수도 있어."
"아냐, 그렇게 화를 내면 괜찮다고 했어. 자꾸 참아서 그런 거지. 욕은 해도 돼."
"어제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지현이 알지?"
"어, 한지현. 왜?"
"걔가 이따 저녁 같이 먹자는데?"
"왜?"
"왜는 무슨, 내가 먹자고 했지."
"걔 최차장 똘마니잖아. 걔랑 무슨 할 말이 있어."
"걔는 그냥 그 사람 아니라도 그냥 똘마니야. 누가 차장이냐만 중요하지, 차장 바뀌면 새 차장 똘마니가 되는 거야."
"그래서? 걔가 내 스트레스의 30%는 책임이 있는 셈인데 사과라도 한대?"
"사과는 술 한 잔 하면서 하라고 하면 뭐, 미안하다고는 하겠지."
"그럼 왜 만나는 거야?"
"내가 보자고 했다니까?"
"그래도 걔도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나오겠다고 했겠지."
"노조에서 나선다고 하길래 자세하게 얘기해 보라고 나오라고 했어."
"그런 걸 얘기를 한대?"
"신났던데?"
"그 얘기를 하겠다고 신나 있다고?"
"응. 내가 노조에서 나서는 것 자체를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하니까 PPT라도 만들어 올 기세더라고."
한 과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슨 얘기는지는 알겠다. 시원한 복수와 정의 구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노조에 찾아갔을 때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최차장이 어떻게 서로 이간질을 시키고 있고, 일을 어떻게 자기 공으로 돌리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했지만, 말만 가지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이해는 간다. 당사자의 이야기가 없었으니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나섰다가 역풍이 불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회사 못 다니겠다고 하고 있는데 둘을 마주 앉혀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좋은 말로 다독여 준 건 고맙지만 딱히 나설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조에서 나선다는 말을 막상 들으니 반갑기도 했다. 내가 휴직을 했다는 사실이 일종의 표지판 같은 게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알바는 신나고 재미있었다. 미술 전시회가 그렇게 매력적인 것인지 몰랐다. 조용하고 정적으로 보여서 실제로도 그런 줄 알았지만, 그 이면은 콘서트 못지않은 준비와 스토리가 있었다. 콘서트 뒷이야기는 뭔가 바쁘고 정신없는 그런 게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지만 미술 전시회는 그런 짐작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 차이점일 뿐이었다. 어떤 분은 그림을 보면서 자기가 찾는 건 이러이러한 분위기인데 살짝 어긋난 느낌이라고 해서 내가 본 느낌과 외운 것들을 바탕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그럼 이 그림은 어떻겠냐고, 입구 바로 앞에 있는 그림으로 안내를 했는데, 들어오면서 바로 지나쳐서 못 봤나 보다고, 자기가 찾던 게 이 그림에 다 있다며 계약을 하러 들어가 버렸다. 그림의 절반 이상이 딱지가 붙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긴장이 풀리면서 뒤꿈치가 욱신거렸다. 구두라고는 출퇴근 시간에만 신어 보았지, 업무 중에는 앉아 있으면서도 슬리퍼를 신었었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서 있어서 그랬나 보다. 점심시간에도 혹시 오후에 화장실 가느라 자리를 비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충 먹고 커피를 들고 와서 어슬렁거리면서 마셨다. 아무래도 이십 년 만의 첫 알바라 더 긴장이 되는 것 같다.
정 과장이 가까이 왔다.
"어휴, 이렇게 이 주일을 해야 된다니 어렵네."
"그래도 안내하고 그러면 힘 나지 않아?"
내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 과장은 울상이다.
"이 그림이 저 그림 같고... 외운 게 그림을 보면 머릿속에서 싹 사라지는 느낌이야. 김 과장은 얼굴 좋네? 일이 맞나 봐."
"나는 재미있던데. 그림도 다 다르고. 공부를 제대로 안 한 거 아니야?"
"아니야, 작품 이름 말해봐, 내가 다 설명해 줄 테니까. 그런데 그게 그림하고 매치가 안돼. 사람 얼굴 기억하는 건 잘 되는데 그림은 사람 같지가 않네."
"그건 정 과장 얘기가 맞나 보다. 나는 사람 얼굴 기억은 못하는데 여기 있는 그림은 가자기고 간 사람들이 집에서 자랑을 해도 몇 번째에 걸려 있었는지 알아맞힐 수 있을 것 같아."
"모양은 다르긴 한데 색깔 톤이 다 같아서 어휴..."
"그래서, 무슨 실수했어?"
"실수했으면 내가 김 과장 앞에 와서 힘들다고 하고 있겠냐? 진작 쫓겨나서 집에 있겠지."
"그건 그렇네. 근데 발꿈치가 엄청 아프다. 얼른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좀 담가야겠어."
"김 과장은 안 가려고?"
"어딜 가?"
"이따가 한 과장이랑 저녁 먹는다고 했잖아."
"한 과장? 한지현?"
"어. 기억 안 나?"
"아 너무 힘든데... 내일도 이거 하려면 오늘 조금만 마셔야 할 텐데 큰일이네."
"그래도 얘기 듣는 게 낫지 않을까? 한 과장이 신나서 얘기한다고 하는 건 이유가 있을 텐데."
"그래, 드러나 보자. 어디야?"
"회사 쪽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한과장보고 이쪽으로 오라고 했어. 여기 전철역 앞에 골목 알지? 우리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들르는 먹자골목. 거기 낙지집 빨간 거 있잖아?"
"아, 거기면 금방 먹고 집에 갈 수 있겠네. 머리로만 일하다가 몸으로 일하려니 힘드네."
"이것도 머리로 하는 일이야. 서서 하는 거라서 그렇지."
"그래, 그래. 그럼 대신 카페라도 좀 가자. 시간 있지?"
"야, 퇴근시간 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어. 예약은 세 시간이나 남았고. 어디 무인텔이라도 가서 몸 좀 담그고 와, 그럼"
"앉아서 커피나 마시다 가야지. 그건 너무 비싸."
카페는 몇 군데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소파 자리가 비어 있는 프랜차이즈가 있어서 들어가서 흘러내리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주문하러 가려면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야 하는데, 발바닥에 다시 힘을 주는 것이 고역이었다.
"김 과장 뭐 마실래?"
"주문해 주게?"
"그래 내가 약속 잡아서 바로 집에 가는 사람 붙잡았으니 내가 쏜다. 뭐 먹을래?"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할게."
"그럼 아메리카노 하나, 라테 하나. 큰 걸로 한다?"
"큰 걸로 할 거면 디카페인으로. 여기 있겠지?"
"있네. 그럼 주문할게."
주문을 한다더니 계속 앉아 있는다. 조금 기다렸다가 짜증 내듯이 물었다.
"주문 안 해? 주문한다며?"
"어플로 했는데? 왜 이렇게 졸라대냐? 목말라? 물 갖다 줘?"
"야, 나이가 몇 살인데 젊은 사람들 따라서 어플로 주문을 하냐? 그래도 하나도 안 젊어 보여."
"젊어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주문받는 사람들도 가서 침 튀면서 주문하는 것보다 이걸 더 좋아해. 기술을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쓰는 사람도 있어야지, 참, 김 과장도 답답해. 피곤해서 그래?"
"그래 피곤하다, 어쩔래?"
"그래쪼요? 피고내요? 나도 피고내요."
그러면서 둘이 낄낄거리고는 곧 조용해졌다. 카페 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금세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운터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나고 곧 정 과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 과장님, 커피 가져다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요, 정마담, 어서 서둘러 줘요."
"이런!"
또 둘이 낄낄거리고 정 과장이 쟁반에 올려 둔 커피를 바로 가지고 왔다. 너무 시끄럽게 떠들었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관심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시끄럽게 하기에는 우리 둘이 너무 지쳤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홀짝거렸다. 피로가 풀리는 느낌 같은 건 없다. 그냥 옛날 주당들이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라며 소주를 들이켤 때의 느낌이 이런 건가 싶었다.
양심적으로, 세 시간을 카페에 앉아서 버티는 건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래서 개인 카페를 기피하게 된다는 건 또 아이러니였다.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데 앉아서 몇 시간을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컴플레인을 해대고, 미안해하는 사람들은 꼬박꼬박 한두 시간에 한 잔씩 시키면서도 미안해서 프랜차이즈에서 앉아 있으니, 이중으로 개인 카페만 힘든 모양새가 아닌가.
"우리 개인 카페에 갈 걸 그랬나?"
"세 시간이나 있어야 하는데?"
"어차피 세 잔 마시면 되잖아."
"소파가 없어서 여기 온 거잖아."
"그건 그렇지."
이렇게 대화가 끝났다. 정 과장도 피곤하긴 한 거다. 아마 회사 소식이 궁금한 정도가 피로를 이기게 해 주는 거겠지.


우리는 자금 관리를 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일은 법률이나 제도의 변화만 없으면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먼저 일을 하고 있었고 정 과장은 나중에 왔다. 그렇다고 해도 전임자가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 되는 일이어서 크게 힘들 것은 없었다. 문제는 최 차장이었다. 최 차장은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가 우리 부서의 차장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딱히 오겠다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지원을 해서 왔다. 오면서 함께 일하던 정 과장을 데려온 것이었다. 정 과장 말로는 전에 일하던 부서에서는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고 했다. 와서도 한동안은 식사도 둘이서만 하기도 했고, 좋아 보였다. 그런데 최차장은 나에게는 이것저것 시비를 걸기 시작하더니, 법적으로 정해져서 적용하는 비율까지도 해당 법률을 뽑아 와라, 제도 바뀌었다는 문서가 오지 않으면 하던 대로 할 거냐 등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잔소리는 상사가 할 수 도 있는 법이기는 한데, 문제는 너무 가볍게, 전임자들보다 자기가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윗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라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단 일회용으로 만드는 자료를 받겠다고 멍청하니 일을 못하니, 타성에 젖었느니 하는 소리를 해댄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면서 나에게만 인상을 쓰고 큰소리를 내곤 했다. 직장 내 왕따라고 생각해서 노조 위원장을 찾아갔다. 크게 터뜨릴 생각은 없었고, 분명히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차장에게 잘 보이겠다고 덩달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생길까 하는 걱정 때문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럼에도 단지 상담받듯이 어디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의견인지만 물어보는 것이 야속했었다.
정 과장은 처음에는 차장과 잘 지냈지만 다른 대리가 차장이 만들어 오라는 대로 자료를 잘 만들어 오니 어느 순간에 구박을 받기 시작했다. 정 과장은 회사 생활을 한 경력이 있어서 다른 부서를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은 피해서 만들었는데, 최 차장의 원래 목적이 자기가 튀는 것뿐이었는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만든 박 대리의 자료를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더니 어느 날 점심시간부터 나에게 하듯이 정 과장에게도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 과장 말로는 그전에 있던 부서에서도 일을 못해서 최 차장이 일을 아예 주지 않은 직원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직원이 정말로 일을 못한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게다가 그 직원도 최 차장이 그전에 있던 부서에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나는 나대로 짜증이 나서, 정 과장은 정 과장대로 사람을 데려다 처음 적응하는 과정에서 방패막이로 세웠다가 자기가 적응하고 나면 토사구팽 하는 패턴을 읽지 못한 자신에게 짜증이 나서 휴직 신청을 했다. 하루씩 비공개로 사장 면담을 하고 부장 면담을 한 후 최 차장이 휴가일 때 최 차장을 건너뛰고 결재를 올려 버렸다. 사장이 물었다.
"걔가 뭘 어쨌길래 다섯 명밖에 안 되는데 두 명이나 한 번에 휴직을 하겠다는 거야?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면 돈이라도 나오는데 이렇게 쌩으로 휴직하면 돈은 어쩌려고 그래?"
"제가 아프면 안 나온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병원에 갖다 바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고, 정 과장은 조금 더 세게 나갔다.
"저희 둘에게 신경 쓰지 마시고, 이제 직원이 세 명밖에 없으니 그중에 스트레스받아서 몇 명이 더 옮겨달라거나 휴직하겠다거나 사직하겠다고 할지 모릅니다. 최 차장을 어디 보내시든지 하시지요."
그리고 휴직을 하고 집에 있게 된 지 두 달이 지나자 드디어 알바를 구하게 되었다. 드디어라고 한 이유는, 두 달 동안 알바를 구하려고 했지만 이제야 자리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쉬기 위한 휴직이 아닌 만큼, 휴식을 하겠다는 의지는 크게 없었다. 스트레스는 최 차장을 볼 일이 없으니 정말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담 예약을 했기에 상담은 받았지만, 증상이 심할 때 먹으라고 알약 세 봉지만 포장해 주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하나 먹어 보았지만 몽롱해지는 느낌이 싫어서 두 봉지는 아직 그대로 있다.
멍하게 있다 보니 한 시간 반이 흘렀다. 홍차를 시켜서 한잔을 더 시켜 놓고 다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니 다시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정 과장은 아직도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그러지."
정 과장도 긴장을 살짝 한 것 같았다. 이제 앞으로 10개월간, 휴직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게 될지, 그냥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것으로 다행스러워할지, 휴직을 후회하게 될지 결정 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시간이라 한산한 카페 안과 달리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회식을 하러 가는 사람들과 지하철을 향해 급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낙지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예약을 해 놓았다고 했지만 미리 들어가서 앉아있고 싶지는 않았다. 퇴사한 것도 아닌데 회사 사람을 마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마치 거래처에서 거래처 영업하듯이 미리 와서 세팅을 해놓고 기다린다는 느낌이 들어서 미리 들어가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한 과장 생각을 해도 최 차장 생각이 나는 더러운 상황이라 그렇기도 했다.
한 과장이 보였다. 정 과장이 손을 흔들자 한 과장도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앉아 있지 그랬어요?"
"야, 우리가 납품업체냐? 원청 직원분 오실 때까지 미리 세팅해 놓고 있게?"
정 과장 생각도 나와 똑같았나 보다. 상황이 같으니까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게 흘러가나 보지.
"그런 게 어딨어요? 제가 먼저 왔으면 저는 들어와서 앉아 있었을 텐데."
"야, 휴직을 해도 이렇게 어색한데 퇴직했으면 아예 만나자고 해도 도망갔겠다, 야."
내 말을 듣고 한 과장이 웃었다. 표정이 뭔가 입이 근질근질한 것 같다.
"아주머니, 여기 예약한 메뉴 주세요"
잠시 후 낙지볶음이 금방 나왔다.
"바로 드실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셔서, 익혀서 나온 거예요. 바로 드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소주를 따르고 정 과장이 분위기를 잡았다.
"야, 우리가 오늘 아르바이트한다고 하루 종일 서있었어. 피곤해 죽겠는데, 네가 예고를 때려서 여기까지 온 거야. 원샷하고 한번 썰 풀어 봐."
"원샷할까요?"
"안전한 복직을 위하여!"
"위하여"
한 잔씩 원샷을 하고 정 과장이 다시 잔을 다 채웠다. 그리고는 정 과장과 내가 함께 한 과장을 쳐다보았다. 한 과장은 약간 쑥스러워하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새로운 소식은 아니고요, 노조에서 최차장 어떻게 하려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다니?"
"결론을, 승진하려고 저런다고 내린 것 같아요."
"그래서?"
"사장하고 위원장 하고 얘기를 했는데"
"결론이 난 거야?"

정 과장은 말을 자르면서도 진도는 빨리빨리 나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조바심이 난 것이다. 하지만 한 과장은 마치 준비한 것을 차례대로 풀어놓는 스티브 잡스처럼 한 번이 하나씩 설명을 했다.
"일단 이사회에 보고를 하고 나야 결정이 나겠지만, 아마 승진을 못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결론을 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승진하겠다고 직원을 밟은 거니까, 무슨 수를 써도 승진을 못하게 되면 안 그러지 않을까 하는 거죠."
"그게 돼?"
"지금 봐서는 감봉 이상 처분을 받으면 몇 년 이상 승진을 못하는 규정이 있거든요?"
"그건 아는데, 그 규정은 실제 처분을 준 적이 없잖아. 감봉을 시키겠다는 거야? 최차장한테? 근거가 되나..."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다 아는 감봉 규정도 있는데 6개월 이상 무보직도 조건에 있거든요. 그것도 이사회에서 승인이 있어야 해요."
"6개월 이상 무보직이면 자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무보직 조건이 되나..."
"맞아요. 자를 수도 있지만 자르지 않아도 승진은 못하죠."
"그게 되나... 기분이 좋긴 한데,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가면 우리도 나중에 골치 아파질 수 있겠구나."
"그럼 사이다가 아니죠."
"사이다야?"
"네. 일단 노조는 최 차장이 우리 회사나 나중에 혹시 옮기더라도 관련 있는 곳으로 옮기면 그쪽 노조와 얘기해서 제대로고 앞길을 막아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어요.
"나하고 얘기할 땐 그런 말 없었는데, 정 과장 때문인가?"
"정 과장님도 그렇고, 김 과장님도 그때는 휴직까지 할 줄 모르셨으니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죠. 그리고 최 차장하고 정 과장님 하고 그전 부서에 있을 때 이 대리도 구박받았다면서요. 회사에 적응 못하겠다고 요양 휴직해 버렸는데 노조에서 그 사람도 찾아가서 얘기를 들었나 봐요. 그래서 지금 노동부 찾아갈 서류는 다 만들었다고 압박을 하고 있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한테 좋은 건 뭐지? 사이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노조에서는 격리 얘기를 하고 있어서... 두 분이 복직하시면 최 차장은 무보직은 해제된 상태지만 아마 자리를 옮길 거예요. 그리고 두 분이 다른 곳으로 옮기기 될 때 최 차장이 그곳에 있으면 최 차장을 옮길 거예요. 최 차장 때문에 두 분이 이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거죠."
"이게 사이다 맞나? 이건 최 차장 괴롭힘 아니야?"
"그런가요... 저는 모르겠네요. 일단 최 차장도 항의한다고 휴가 내고 있는 상태인데 그 얘기를 듣고 오히려 사장님하고 이사님들이 적반하장이라고 길길이 화를 내고 계셔서 처음부터 자업자득인 것 같은데요..."
"노조도 이렇게 나서는 일이 별로 없잖아."
"이건 노조 문제라기보다는 중간에서 최 차장이 결과적으로 노조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하고 있어서 노조를 키워주는 역할밖에 안 하니까 회사에서 호응을 해준 거 아닐까요?"
"결국은 이사회 통과가 다 되고 10개월 후에 우리가 복직할 때 어떻게 되는지까지 봐야 다 끝나는 거네. 최 차장 만나면 우리한테 지랄지랄 할 것 같은데."
"일적으로 지랄하는 거 아니면 들어주고 있을 필요가 없지, 우리가. 자꾸 일을 못하면서 월급을 축낸다는 식으로 가스라이팅하니까 듣고 있던 거지 뭐."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신이 날 줄 알았는데 셋 다 약간 침울한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 둘은 미래에 대해 별다른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휴직을 하고 나와 버린 것인데, 생각보다 변화가 있었다. 거꾸로 생각해 보니 휴직을 해 버렸기에 생긴 변화였기 때문에 아쉬워할 건 솔직히 없었다. 휴직을 하지 않고 있었다면 최 차장은 계속해서 폭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돈 안 받고 일 안 하고 만다'라고 소리칠 때까지 해결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게 씁쓸했나 보다.
한 과장은 한 과장대로 사장과 이사회에서도 우리 편을 들었다는 생각에 신기해서 신이 났던 모양인데, 차근차근 정리해 보니 그냥 자업자득이었던 거라서 허무해진 것 같았다.
"한 과장, 오늘 우리 만난 거 회사에서 알아?"
정 과장이 물었다.
"네, 알죠. 오늘 하루 종일 사람들이 저 얘기만 해서 제가 끝나고 전해주겠다고 하고 연락드린 거예요."
"그럼 오늘 회사 분위기가 오늘 신나서 한 과장이 얘기할 때 그런 분위기였어?"
"그렇죠, 뭐. 최 차장도 출근 안 하고 있고 그러니까요."
"일은 잘 돌아가지?"
"할 일 아닌 걸 시키는 사람이 없으니 해야 할 일만 잘하고 있죠."
"그래."
말없이 낙지볶음만 먹고 술만 마셨다. 셋이 소주 한 병. 이 정도면 내일 일어나서 알바를 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한 과장, 이렇게 소식 전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퇴사한 전 직장 동료도 아니고 휴직만 했는데도 이렇게 어색하네."
"그러게요. 다른 일을 하고 퇴근하고 셔서 그런가, 복장도 출근하실 때 하고 다르고요."
"우리 알바 없을 때 거하게 하자."
"네, 다음날 휴일일 때로 한 번 잡지요."
술값은 내가 냈다. 우리 둘 다 한 과장에게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말을 서너 번은 더 했다. 최 차장이 없으니 앞잡이가 그래도 그게 진심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과장이야말로 회사 생활을 그냥 회사 생활로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자료를 만드는 것에서도, 자료를 검증을 하는 데에서도 어떻게 잘도 빠져나갔다. 참으로 절묘한 처세술이다. 그렇다면 굳이 시간을 내어 우리를 찾아온 것도, 우리가 복직하면 새로운 주류가 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을까?
모든 것을 계산한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치지만, 그 계산의 결과 우리가 반올림이라도 된다면 그것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조금 일찍 출근해서 그림을 한 점 한 점 자세히 보아야겠다. 사람은 분석을 해도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고, 섣불리 판단에 의지할 수도 없지만 그림은 분석을 해도 나의 판단은 나만의 것이라 자유롭다. 그림을 보는 일이 생각보다 나에게 맞는 일이구나. 하지만 먼저, 집에 도착하면 뒤꿈치를 뜨거운 물에 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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