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쓰고 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무슨 이야기를 쓰려고 처음에 그 문장을 쓴 건지는 모르겠다. 생각나는 거라고는 두 문장을 쓰자마자 나머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는 것뿐.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문장을 쓰고 이어서 세 번째 문장을 쓰려하던 내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결말이 떠올랐다. 그 결말이 도입부와 연결되고, 그 첫 두 문장은 실제로 이야기의 시작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도입부가 결말과 곧장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어중간한 상태가 되었지만 마치 종로에서 두산타워를 보고 "얼마얼마 정도면 도착하겠군."이라고 생각할 때처럼 확신 없이 결말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날은 썼지만 길을 만들어서 가야 하는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둘째 날부터는 계속 망설이고만 있었다.
사실 글을 쓴다는, 글 쓰는 사람의 겉모습에 대한 상상은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환상이 뒤섞여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건반으로 몇 번 두드려 보고 "어? 이거 좋은데?" 하면서 작곡이 끝난다는 음악가에 대한 환상이나,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환경에서 환상적인 발표자료를 만들어 발표를 들은 직원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쳐주는 직장인에 대한 상상이나, 타자기나 컴퓨터 앞에 앉아 한 번씩 머리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가 태풍이 휘몰아치듯 한 번에 엄청난 양의 글을 몇 시간 동안 쳐대고 며칠 만에 작품을 탁탁 내놓는 족족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작가에 대한 상상이나 마찬가지다.
고민을 해서 답을, 정해져 있는 정답은 없지만, 그리고 그 문제를 내게 제시한 사람도 없지만 최대한 내 관점에서만이라도 정답에 가깝게 내놓는다, 이게 내 노력의 한계다, 라며 글을 내놓으면 부끄럽지만 동시에 뿌듯하고 지금의 한계가 이 정도라면 더 어렸을 때였다면 세상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을 텐데 전에 글을 쓰지 않기 잘했다는 조금 부조리한 칭찬도 머릿속을 차지하게 된다. 그 답지 하나하나가 쌓여 앞으로의 답안에도 영원히 영향을 미치리라. 여기서 필요한 믿음은 딱 하나다. 글을 쓸 때 이야기가 되었든 속마음이 되었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상한선은 놀랍도록 글 속에서 솔직하게 드러난다. 나는 모든 글이 그러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고 단지 그 상한선이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정답이라는 것에 점차 근접해 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정답은 죽고 나면 슬쩍 알려주려나? 어쩌면 정답에 가까워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그 생각만으로도 만족해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