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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부

by 루펠 Rup L

공부.

기의 운행을 알아보고,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깨달은 이치로 순조롭게 세상을 풀어나갈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을 공부라고 한다. 깨닫지 못한 의미를 반복해서 읽어나가 안개가 걷히듯 점점 어렴풋하게나마 진리의 형체를 알아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공부라고 한다.
사실, 그런 식의 공부라는 개념은 역사책이나 무협지에나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교과서에 있는 것을 달달 외우는 것, 많은 문제를 풀고 과제를 해결하면서 얼마나 외웠는지, 혹은 얼마나 이해했는지 파악하는 것이 공부에 대한 익숙한 의미이다. 이것은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어서, 직장인들도 공부를 한다고 하면, 다양한 공부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격증 취득을 위한 책 암기, 문제풀이, 회사에서 필요한 법률이나 규정 암기, 혹은 규정들의 적용 사례 이해, 그도 아니면 외국어 단어 외우기, 대화 연습하기 등으로 한정될 뿐, 활동 자체가 다양한 건 아니다.
그래서 나도 쉬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써보지만, 단지 글을 쑤는 연습을 하는 것일 뿐 딱히 공부를 한다고 표현하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세상에는 많은 글이 있고 그 글들을 참고해서 내 글을 점차 다듬어 가는 것은, 우주 공간 어딘가에,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또 다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그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했다. 쉽게 말해서 내가 글을 쓰는 과정은 그 글을 읽은 사람이 내 글을 통해 머릿속에 새로운 세상을 상상함으로써 그 세상을 창조한다고 하면, 프로그램이 실행되면서 그 프로그램 안에서 또 다른 새로운 운영체제가 실행되는 가상환경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나무 안에 이미 목각 인형의 모습이 들어 있듯, 텅 빈 우주공간 속에도 내 글의 이미지가 살아 있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상상으로는 그저 실체가 없는 허공의 거품으로 남을 뿐이다. 이를테면 그냥 이름만 지어 주었을 뿐이라고나 할까. 그 이름은 실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그 자체로 거짓말이 된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셈이니까. 내가 좋아할 만한 내 글은,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발견'해 내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책을 읽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막연히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데에서 나아가 책의 글들은 내 글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예전처럼 재미있게 책을 읽다 보니 다시 책의 숲, 이야기의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글을 쓴다는 데 대한 부담은 잊어버렸다. 대신, 글쓰기를 양으로 해 나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하나씩,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을 조금 안다. 일을 하면서 오래전에 잠깐 느낀 적이 있다. 부족하지만, 지극히 부족하지만 굳이 말로 하자면 공부의 필요성이다. 문제를 풀고 점수를 얻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무협지에 나올 것만 같은 그런 공부다. 방법도 방향도 모르지만 그 생각이 튀어나온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내가 마냥 헤매 다닌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시.
나는 아직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시를 읽고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시에도 그 목적 자체가 말장난인 그런, '자칭 시라는 것'이 아닌 이상 번역을 해도 느껴지는, 언어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성경의 시편은 내가 시를 읽는 법을 모르고 읽지만 느껴지는 이미지가 있다. 그건 내 경험과 성경의 다른 책들이 주는 이미지 전체의 총합을 시편의 한 줄 한 줄이 통과하면서 묻히고 나온 것들이다. 이것을 다른 시에서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야기를 읽는 것은 어릴 적부터 늘 해온 익숙한 활동이다. 시를 읽는 것은, 비유 하나하나와 문장 하나하나 보면서 감탄한 적은 있어도 한 편 한 편을 각각의 개체로 인식한 적은 없었다. 그림을 볼 때처럼 읽고 막연히 기분이 좋다, 슬프다 같은 느낌 정도로 만족한 것이다. 시를 읽는 법을 공부해야만 언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온전해지고, 그 이후에야 언어를 관통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오리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이것이 나중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다르게 표현될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을 본 느낌을 번역을 해서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다.
시를 찾는 길은 그 지식의 뿌리를 찾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아직은 시를 알아야 내가 쓰는 언어가 더 완전해지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시와 언어가 상관이 없다면 적어도 시를 알게 되면 내가 잘못 알았다는 사실이라도 깨닫게 될 것이다.
항상 안개는 길을 조금씩만 보여준다. 보이는 길로 끼어들더라도 안개는 금세 앞을 가로막아버린다. 그러나 보이는 방향, 안개가 딛고 있지 않은 주먹만 한 공간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느리겠지만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더라도, 돌아왔을 때의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을 나보다 훨씬 많은 감각을 경험한 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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