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떤 발견은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실제 걸어갈 새로운 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지나다 보니 내가 생각했던 길이 아닐 수는 있어도, 가볼까 하는 길이 우연히 눈앞에 펼쳐지는 경우는 꿈속이 아니라면 단연코 없다. 그 길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 과정은 인간사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갑작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발견'이라는 것은 예외이기 때문이다. 발견을 위해서는 탐색이 필요하다. 그 탐색은 관찰이라고 불리지만,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것이라면 아마도 '고민'이라는 단어보다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고민은 여러 갈래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가려낼 때도 사용되지만, 거꾸로 보자면 그 갈래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고민을 이어가다 보니 그때까지 눈앞에서 놓치고 있던 풀숲 사이의 오솔길이 보이기도 하는 법이다. 고민 끝에 새로운 길을 찾게 되면, 그 길을 따라갈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게다가 기존의 길들에 대한 고민도 새로운 길이 포함된, 더 많은 선택지가 있는 똑같은 고민으로 확장이 된다.
아직은 새로운 길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그 길 자체에 대한고민과 선택에 대한 고민,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길에 대한 탐색이 어우러지면서, 그리고 지속적인 고민과 관찰로 그 길에 대해 새롭게 덧붙여지는 정보와 전망이 업데이트되면서 길의 선택지에 대한 전반적인 탐색도 매 순간 새로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길이야말로 시간을 들여 찾아낸 나만의 열정의 표지라 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고민거리가 두 배가 되었으니, 대부분 여기서 지쳐서 그냥 원래의 고민의 답만 찾으면 그대로 떠나보내기 일쑤이다.
나는 여기서 아직 선택의 고민도 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쓰고 싶은 글이란 표현하고 싶은 것이고, 그 표현이라는 것은 방식과 이미지 같은 것들 뿐 아니라 내가 흡수한 세상의 어느 면에 대한 것인지까지도 포함될 것이다. 프리즘에 비유하자면, 빛을 곡면에 뿌릴지, 평면에 뿌릴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만 분리해서 보내줄지, 만화경처럼 보여줄지 뿐만 아니라, 햇빛을 받을지, 특정한 램프의 빛을 사용할 것인지까지도 선택해야 하는 것과 같다. 닥치는 대로 내보이는 것은 연습으로 반복해서 프리즘 자체에 익숙해지려 할 때는 얼마든지 해도 되는 일이다. 그러나 연습을 벗어나서는 어떤 또렷한 의미적 목표가 있지 않으면 결국은 나 자신이 내가 사용하는 도구들에게 밀려나게 되어 있다. 내 머리 또한 연습 상태로 쏟아내는 글은 결국 필요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내 머릿속의 프리즘에는 세상의 어떤 면이 가장 읽을 만한 글을 만들어낼지. 이것은 아직 결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방향이 새로운 길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 길을 가도 될지 고민될 정도로 구체화되기 전까지는 발견을 위한 고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민을 멈추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지치는 것,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을 포함한 글을 쓰는 여정 전체를 통틀어 지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지치기 전에 길을 찾아내기를.
길을 찾아내고 나서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새로운 길을 계속해서 발견해야 할 테니
그때도 고민의 무게에 눌려 지치지 않기를.
글 다운 글이 나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