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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들다

by 루펠 Rup L

글을 쓴다는 것은 곧 표현을 한다는 뜻이다. 글의 주제가 머릿속에 있는 것이든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이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똑같은 화재 현장을 보아도 목격자들의 말은, 줄거리는 유사할 수는 있어도 똑같이 들리지는 않는다. 물론 똑같은 말을 할 수도 있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판에 박힌 표현'이라고 부른다. 어느 정도 창작의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는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수는 있겠지만 카메라에 찍히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여주듯이 현장과 <똑같다>라고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판에 박힌 표현을 한다 해도 그것은 문장의 다양성만 해칠 뿐, 그 말을 듣고 상상되는 것이 항상 실제와 비슷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실제는 문장보다 다양할 수밖에 없는, 무한대의 가능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자라난 후 외부 세계에 뻗친 가지에서 돋는 나뭇잎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는 경험이 쌓이고 영양분이 축적되면서 줄기와 함께 커지기 때문에, 어렸을 때라고 해서 그 벽을 넘기는 나뭇잎이 없을 수는 없다. 어릴 때는 나무도 작지만 오히려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는 더욱 좁았을 테니. 단, 수박을 키울 때 쓸데없는 줄기를 그때그때 잘라내야 크고 맛있는 열매를 기대할 수 있듯이, 내 표현의 나무를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나뭇잎의 모양을 보고 가지를 다시 선택하고 필요 없는 가지는 잘라내는 일이 쉬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
글을 쓰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 맛있는 물 한 모금 같은 존재이다. 마시고 나서야 느낄 수 있는 그 상쾌함 때문에 키보드 치는 소리, 펜촉이 종이 위로 지나가는 소리, 엔터 키를 경쾌하게 치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모두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된 것이지만, 되돌아보면 그 과정에서 글쓰기 자체에만 몰두했을 뿐 그 물이 맛있는 '이유'에는 전혀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남이 보는 세상과 다르다. 글을 쓰면 온전히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뇌가 파악한, 유일무이하게 왜곡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데 있어 도구가 중요한 이유는, 그 표현까지 이르는 과정을 글을 쓰는 행동이 방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일 뿐이다.
완전히 선후가 바뀌어 있었다는 깨달음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이제야 도구 탓에서 벗어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글을 쓰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내 눈으로 파악한 세상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그 세상에는 반대로 내가 보기에 '나는 세상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의 고민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문제는 관점이다. 얼마나 나에게 맞는 관점을 찾는가. 이것이 이제까지 없던 방식이라면 새로운 형식을 찾을 것이고, 기존의 방식으로도 내 관점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 방식은 유한하고 파악의 방식은 무한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 필터로서의 표현의 방식을 통과한 세상의 모습을, 표현의 방식에 다시 꿰맞추는 껍데기 역할을 하는 걸까.
이제까지 나는 내가 무슨 글을 쓰든지, 그전에 세상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글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읽는 순간 그 한 명 한 명의 머릿속에 내 글과 그 사람의 인생의 총합에 맞는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고 상상해 왔다. 이것 역시 나의 표현이 아무리 제한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타자인 독자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내 글도 결국 세상의 것인 만큼 무한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쓰는 것, 그리는 것, 떠드는 것과 읽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또한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매 순간 무언가를 읽고 감상하는 것이 내 머릿속에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오락이지만, 또한 창조인 만큼, 진심으로 감상한다면 글을 쓰는 것만큼 창의력을 사용하는 쾌락이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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