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기 시작한다. 한없이 오를 듯하다. 투자시장이라면 한없이 오르리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순간이 이어진다. 등산이라면,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조금만 더 힘내자고 중얼거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는 건 단순한 사인(sin)파이다. 마이너스가 있고 플러스도 있어 정상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다 완만해졌다 싶으면 마이너스를 향해, 올라온 높이만큼의 깊이까지 추락해 버리고, 왠지 내리막이 현기증을 진정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해졌다 싶으면 다시 오르막이다. 아마 우리 뇌가 인식하기에 삶에서 감정이라는 것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 한 번 사로잡히면 세상 무엇도 집어삼킬 듯하다가도 잠시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감정에 잠겨 있곤 하니까.
학창 시절, 엄한 선생님 수업의 숙제를 깜빡한 날, 또는 시험을 망친 날은 따뜻한 햇빛마저, 오히려 따뜻하다고 피부의 감각은 느끼고 있었기에,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고, 내 것이었는데 빼앗겼다고 느끼고는 했다. 또 평소 지독히도 싫어하던 비 오는 날의 젖은 신발도 집에 새로운 장난감이 와 있으면 집에 가서 벗으면 그만인 그런 것이 되어 있었다.
사인파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전기이다. 교류 전류는 위아래로 진동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전류는 앞으로 나아가며 자기장을 만들고 거기서 유도된 전기장이 다시 자기장을 만드는 형태로 스스로 재구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에 전선에서 잃어버리는 에너지가 직류에 비해 훨씬 적다고 한다. 대신 집에서 사용할 때는 다시 직류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교류를 직류로 변환하는 과정을 정류라고 하는데, 사인파의 플러스 쪽과 마이너스 쪽을 서로 분리한 후, 회로를 이용해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변환을 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전기를 충전하는 성질이 있는 콘덴서를 써서 평균보다 높은, 사인파의 꼭대기 부분을 저장했다가, '0'에 가까운 부분이 올 때 그 전기를 사용하면 어느 정도 비슷한 레벨의 직류전류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쉽게 말하면 플러스건 마이너스건 높은 부분을 낮은 부분에 채워 넣어서 네모 모양으로 만든 후 마이너스 네모를 플러스 네모 사이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실제와는 너무 다르게 요약이 되기는 했지만, 개념만 보자면 대략 이런 방식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꼭대기 부분을 떼어다가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부분이다. 꼭대기라는 것은 높다, 그 양이 많다는 것이니까. 감정을 글로 옮길 때는, 글을 쓰는 행위와 글을 읽는 행위가 모두 지성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감정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야 한다. 웃느라, 또는 우느라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보다 전달을 제대로 하고 공감을 조금 덜 일으키는 게 낫다. 그렇다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면서도 글이 유려하다는 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꼭대기 부분을 잘라내어 표현의 범위 안에 잘 집어넣으면서도 그 잘라낸 에너지를 글 어딘가에 잘 숨겨서 글이 가지는 전체 에너지는 보존하는, 원래 감정의 힘 전체가 글 속에서 보이지 않게 건재하는 상태일 것이다. 감정의 피크를 글에 담을 수 없기에 그 부분을 잘라냈지만 글에 내포시키지 못하고 잃어버려서(혹은 버려서) 그 에너지가 사라져 버린 글은 감정의 오르내림은 그대로 있겠지만 감정의 풍부함과 그 강도는 깎여서 읽다 보면 읽는 사람이 힘을 내야 할 것 같은 글이 되어 버린다.
'우리나라말이 서술어 때문에 힘이 나지 않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게 사실이라면 외국의 글들도 번역 과정에서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다 힘이 빠져야 하는데 그런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장 원리를 들이대자면, 아마 그런 글은 한국어로 번역해도 돈이 되지 않을 거라고 출판사에서 걸렀기 때문일 수 있다. 그 말은, 서술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한국 문학 작품글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도 충분히 힘껏 밀고 가는 번역서들이 증거이다.
그렇다고 감정을 일으키는 글이라고 해서 선동적인 말투나, 혹은 그런 도구들이 남용된 경우는 많지 않다. 적어도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오히려 감정을 강요하면 반감이 일어날 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무미건조하게 감정의 폭이라곤 없는 글을 쓰려할 필요도 없다. 감정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글도 없고 감정을 일으켜야 하는 글도 없다. 그저 그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중요할 뿐이다. 그렇지만 일부러 감정을 눌러버리는, 혹은 깎아버리는, 그리고 그것이 일부러 장치로써 그렇게 한 것이라고 느껴지는 글을 읽으면 선동하는 글을 읽은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반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자면, 선동하는 글은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중간 멈추고
"지금 네 감정이 어때? 이 부분 듣고 어땠냐고? 말해봐, 그거 인정하지 않으면 더 진행 안 할 거야."
하는, 어린아이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감정을 깎아낸 글은
"난 아무렇지도 않다. 듣든지 말든지. 더 들려줘?"
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이 중에서 함부로 감정을 깎아내고서 그걸 가지고 어쩔 줄 몰라 그냥 감정적으로 주저앉아버리는 글을 선호했던 것 같다. 특히 인간극장 내레이션 톤으로 상상하고 쓴 글이 그렇다. 그 톤은 나와 정말 맞지 않는데 오랫동안 몰랐다. 배우 하정우 씨가 그냥 담백하게 읽을 것 같은 톤으로 상상하고 쓰는 글이 훨씬 내 글과 잘 맞다. 하긴, 별생각 없이 선택하고선 습관처럼 몇십 년을 흘러왔긴 하다. 인간극장이 좀 오래됐어야지.
그러나 한 가지 비밀을 말하자면, 최근 나는 글을 쓰고 다시 읽을 때 영화배우 유지태 씨가 편지를 읽는 톤으로 상상하고 읽는다. 그게 내 글에게 훨씬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