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작가들의 작품집을 바라본다. 시간이 걸린다. 두 페이지 남짓한 시를 읽는 데 열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읽는 만큼의 시간이 걸릴 수 있듯이 그림도 한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할 수 있다. 글과 그림, 의미와 의도와 표현에 대해 생각하면서 최근의 그림들을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했다. 표면에 만든 의도대로 의미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존재와 의도의 결합이라면, 그 의미들 역시 그 자체로 내재된 의도가 있는 것이어서, 어떤 그림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 대신 다른 것을 가리키게 된다면, 실제로 거기선 잘못 사용된 셈인 그 방법이 그림이 지금 가리키는 것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위해서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을 수 있다는 뜻이니, 문장에서 조사하나 잘못 써서 쓴 사람의 의미와 다른 뜻을 가지듯이 그림도 스스로의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림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면,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작품에 투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유효한 시도일 것이다. 그보다는 그림 자체가 내포한 의도를 문장으로 나타내는 것이 그림에게나 나에게나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뭐, 작가에게는 그다지 환영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길이 보인다. 원래 그런 건 아니고, 길을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데생조차도 연필의 결이 각종 경계들과 얽히면서 길을 만든다. 그 길을 따라가면, 석상의 얼굴로 보이던 것이 사람들이 겪은 세월이나 생활이 되기도 하고, 단순한 명암 차이가 대륙의 높낮이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멀리서 볼 때야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잘 표현한 것이 인물화든 풍경화든 괜찮아 보이겠지만, 그렇게 탐험을 시작하면 그게 다가 아니다. 그러면 연필이 지나간 자국 하나, 지우개가 만든 흐릿한 서리 한 줄 한 줄이 중요한 표지판이 되어 그림 자체보다 내 주목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붓터치가 인상적인 화가들이 많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색과 형태와 명암, 또는 형태와 명암만으로도 아무것도 못할 지경이니까. 하루에 한 번 글을 쓰고, 소설을 조금씩 완성해 나가고, 연필을 들고 그림 연습도 하고(종이도 샀다) 수첩에 쓴 글을 키보드로 옮기는 모든 일을 여가 시간에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주말에 일부를 몰아넣고 일부는 과감히 포기한다. 그러면서도 책은 계속 읽는다. 회사에서보다 집에서 더 바쁜 희한한 일상이다. 그 와중에 읽던 책과 별도로 그림책이 있어서 현대 작가들의 작품사진이나 반 고흐, 세잔, 호크니의 작품 사진들을 멍하게 들여다본다. 스스로 정화된다거나 하는 걸 느낀다면 거짓말이고, 앞에 썼듯이 길을 찾아가는 '연습 아닌 연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고물상에 처음 가본 아이들이 고물들 사이를 위험을 모르고 헤집고 돌아다니듯이 신기한 느낌들을, 작품에서 의도했지만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을 파악하거나 외우거나 하는 이성적인 활동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연습은 내게 미술 감상의 폭을 확 넓혀 주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글을 읽고 나서의 머릿속 잔재들의 후처리에도 유용하다. 드러난 것을 통한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한 앎이지만 지식은 아닌 어떤 것, 문장에 나타나 있지 않은 가능성의 집합을 감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까미유 피사로의 <Houses at Bougival(autumn)>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