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에서 밭 앞으로 난 길과 집들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을 모습을 상상하니 곧 작가도 그 길을 여러 번 걸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 길에서 그가 그림을 그린 곳을 바라보면, 아니면 혹시 그 길 한가운데 서서 길이 난 방향을 쳐다보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 보았다. 이런 생각은 클로드 모네의 <La Rue Montorgueil>을 보았을 때 반복되었는데, 오히려 멀리서 보지 않으면 전체를 상상하기 쉽지 않았기에 나 나름의 시선이 더 나아갈 길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림으로 그려진 길에서 다시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길을 찾는 것으로 형태만 달라진 것이다.
더 과거로 가자면, 헤밍웨이의 '언제나 파리는 축제'를 읽다가 작중에 나오는 그림들을 하나하나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된 것이 미술 작품에 대한 관심 자체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곧장 추상화로 가기는 불가능했지만, 그동안 쓴 글에서 보이듯이 인상파 그림들을 통해 넘어온 과정이 미술사 책에서처럼 딱딱 나눠서 멈추지 않은 덕에 지금까지 그림들을 보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림을 보면서 길을 찾는 것은 그림을 계속 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림을 더 이상 보고 있지 않은 순간부터 우리의 정신은 그림의 감성이 아니라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즐거움을 찾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 그림을 보고 상상한 것이든 경험을 되씹어 보다가 상상하는 것이든 나에게는 새로운 것들일 뿐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글이 된다. 그리고 글로 쓰는 과정도 일종의 노동이기 때문인지, 쓰고 나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서 다른 글을 쓰는 데 바탕이 되거나 다른 그림이나 글을 감상할 때 화학반응을 일으키고는 한다. 그러나 굳이 그림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상상을 할 필요는 없으니 그건 글을 앞에 두고 딴생각하다가 시선만 페이지를 넘기고 머리로는 읽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처럼 그림도 그런 만큼 감상의 폭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한 번 읽을 때 최소 스무 번 정도 반복해서 읽고 나면 그때부터 심상이 생기기 시작하는 느낌이 드는데, 그림이라고 해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