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이 변하는 통로로서의 글

by 루펠 Rup L

올해 1월, 몬테네그로에서 구입한 수첩을 다 쓰고 나서 그 이후로 두 권째 수첩을 다 썼다. 새 수첩의 종이를 넘겨볼 때와 글자에 따라 무작위로 뻣뻣해진 종이를 넘길 때는 느낌이 무척이나 다르다. 모든 페이지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고, 생각 없이 끄적인 문장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 생각보다 글자들이 빽빽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의외로 그동안 쌓인 습작을 보는 것처럼 과거를 향한 설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한 권을 쓰면서 싸구려 볼펜 네 자루를 썼고,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나의 관점이 변하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것도 바로 이 수첩이었다. 앞으로도 모든 수첩은 나름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각자 품게 되겠지만, 이 수첩은 확실히 '그림'이라는 주제가 가장 중요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한다.
몇 년 동안 자원 낭비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서인지, 종이도 아껴 써야 하니 글도 웬만하면 컴퓨터로 쓰고 회사에서도 일부러 프린트하지 말고 파일 그대로 결재를 올리라고 한다. 회원 가입이 되어 있는 프랜차이즈에서는 영수증도 앱에서 보는 형태로 바뀌었다. 아마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영향을 제법 받았지 않았을까 싶다. 느낌 좋은 키보드가 많이 나온 것도 한몫했겠지만.
그렇지만 여전히 문서가, 원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 이 글도 인터넷에 올리고 나면 저장 시기가 실제 기록된 그 날짜가 맞는지 해당 서버에 대한 변조여부 확인 전에는 확신할 방법이 없다. 해당 웹사이트가 그 사실을 법원 등의 기관으로부터 확인받을 때까지 모두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첩에 남긴 날짜는 앞뒤로 비교해서 맞는지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사실, 내 수첩에 있는 글은 그래서 제목이 없다. 제목은 인터넷에 올릴 때 즉흥적으로 짓고, 수첩에는 그저 그날의 날짜만 달랑 적혀 있을 뿐이다.
이런 시기에 그림에 관심이 생기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미대생들의 화두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조금이나마 접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가 학교 다닐 때 옆에서 본 미대생들과 비교해서 대부분 그대로여서 놀랐다. 자원 절감? 결국 사람이 몸으로 하는 노동이라, 연습이나 반복이 생명이어서인지 결국 종이를, 캔버스를, 연필을, 물감을 계속해서 소모해 가며 거듭해야만 한다. 볼펜 잉크를 다 쓰고 수첩을 다 쓰고 나서 자원 낭비를 하고 있다고 자책할 일이 아니라, 그렇게 계속 써내는 것은 기정사실로 놓고, 내가 그동안 사용한 자원보다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관점이 바뀌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채우고 앞표지로 넘어왔다. 나는 수첩을 오른쪽 면에만 쓰는데, 그렇게 해서 뒤표지에 도착하고 나면 수첩을 뒤집어서 다시 오른쪽 면에만 쓰기 때문에, 그 수첩에서 정말 마지막은 앞표지 뒷면이 되는 셈이다.
이제 수첩을 덮으면 새 수첩의 비닐을 뜯을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우연찮게 다음 수첩은 그림 연습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삶과 글이 계속해서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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