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였다. 가장 작은 불에 올려놓고 씻고 나오니 잠시 후 때맞추어 쉬익 하고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증기가 커피를 뚫고 나오는 시간이 모두 지난 후 드디어 커피가 끓는 소리가 난다. 아니, 증기가 되지 못한 물이 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가스불을 끄고 수탉이 그려진 컵, 식기건조대에 뒤집혀 있던 그 컵을 꺼내 다시 뒤집어 똑바로 미처 내려놓기도 전에 다른 손으로 모카포트를 들어 커피를 따랐다. 어떤 때는 큰 컵을 꺼내 뜨거운 물과 섞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대로 마시기도 한다. 기준은 없다. 그저 변덕에 맡길 뿐이다. 그러다 한 모금 마시고 컵을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조금 전까지 커피를 마시며 읽으려던 책의 표지를 펼칠 생각도 없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커피 향에 대한 언급 없이 커피 향을 내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바로 뒤에 든 생각은, 당연히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한 언급 없이도 어린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많이 안다. 전 세계 사람들의 공통은 아니라도 최소한 우리나라에만 한정하면 그 정도 대표성은 있는 뭔가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학교에는 자정이 되어 앞을 지나가다 쳐다보면 눈이 마주치게 된다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었다.>는 소리는 얼마나 들었는지.
<폴 바셋 매장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안에는 분주한 직원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오픈 시간이 지났기에 자동문 버튼을 눌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꽃에 코를 대면 그제야 왜 몰랐는지 의아해질 만큼 진한 신선함이 코를 누르듯이, 이미 증기 압력으로 충분히 누르고 찌르고 할퀴면서 만들어진 이곳만의 갈색의 반가운 향기였다.>
지금은 생각을 아무리 해도 겨우 이 정도이다. 아니면 커피 그라인더를 떨어뜨려 원두 가루의 향이 확 퍼지는 상황? 그러고 보니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셔도 생각 없이 마시다 보니 상황만으로 커피라는 단어 없이 커피 향을 상상하게 하는 건 아직도 역부족인 듯싶다.
나는 문장은 부드럽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껏 꾹꾹 눌러 담아도, 부드럽게 나와도, 가볍게 툭툭 튕겨 나와도 읽는 속도는 똑같다. 그러고 나서 읽은 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받아들일 때 화학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꼭꼭 눌러 담는 건, 시 정도로 족하다. 수많은 말이 이어지는 산문에 모든 문장을 의미로 채우면, 결국 읽을 수 없게 된다. 지쳐 나가떨어질 테니까. 그렇지만 지엽적인 의미 대신, 그러니까 문장이나 단어 하나하나가 지고 가야 하는 짐 대신, 그 짐을 문단 단위로, 글 단위로 펼치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드는 대들보 몇 개보다 많은 지지대를 세우면 지지대 하나당 버텨야 하는 의미는 줄어들고 글은 더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모든 고수들이 이야기하는 '힘을 뺀다'는 말의 글쓰기 버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문장 단위로는 힘을 빼더라도 그 의미는 문단 안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산문은 그림과 맞닿게 된다. 조각도 마찬가지겠지만 한정된 차원의 공간에 의미를 담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색과 선을 사용한다. 아마 화가의 마음속에선 아무 색도 칠하지 않고 아무 선도 아직 스케치조차 없는 빈 캔버스라도 그 표현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동안 "작업실 창가 구석에 세워둔 이젤에 뒤집어 놓은 50호 캔버스"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 의미가 충분할 것이다. 남들은 알 수 없지만
무엇을 표현하려는 건지, 그리고 스스로 그 의미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표현하는지에 따라 잘 그린 그림일 수도 있고 불만족스러운 그림일 수 있으리라. 그런 것도 없이 그럴듯한 게 목적이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글은, 알맹이가 없으면 애초에 문자는 그림이 아니므로, 그럴듯한 것은 목표가 될 수 없다. 특히 모두가 바쁜 시점에 그런 것을 읽으라고 들이밀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의미, 의미 이러면서 계속 시와 그림을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혹시 헛된 욕심만 늘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고민의 시간은 항상 뭔가를 보상했다는 게 지금까지 경험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그 고민들에 대한 보상도 내가 알아듣지 못하면 온전히 누리지도 못하는 그게 정말 보상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계속해서 공부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