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보면 소설을 쓰는 기계가 나온다. 그 책을 읽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그 기계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소설 속의 흥미를 끄는 장치 정도로만 생각했고 사실 소설의 결말과 달리 그 기계가 그 소설 안에서 결국 어떻게 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소설에 있어서 우연이라는 요소는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다르게 작용한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우연히 발생을 한다고 해도 그 구현에 있어서는 결국 작가가 문장의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대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문장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문법과 함께 앞뒤 문장의 맥락을 살펴보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일어나게 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필터가 상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미술에 있어서 우연의 요소를 받아들이기 위해 물감의 흐름, 쏟아짐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쏟아짐이 먼저고 색깔이 그다음이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테크놀로지적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첫째.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기성의 물감을 쏟는다. 그러면 마지막에 쏟은 물감이 가장 위에 덮일 것이다. 그 이전에 쏟은 물감은 그 아래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을 것이다. 모두 가늘게 흘려보냈다면 조금 더 많이 골고루 보일 것이다.
둘째.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나노 물감을 쏟는다. 이 물감은 완전히 마른 후에도 자체 배터리가 소진될 때까지는 색깔을 바꿀 수 있다고 하자. 작가는 겹겹이 덮인 모양의 물감들을 이리저리 색을 바꿔가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색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작가가 최종적으로 결정할 때까지 그 느낌은 가변적으로 남아 있다.
글의 경우에는 우연의 효과가 위의 두 번째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연의 요소가 최종적인 단계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글자를 집어넣고 난수를 돌려서 나온 순서대로 돌린다고 하면 당연히 아무 말도 되지 않는 글자들이 찍힐 것이다. 그 글자들을 배치해서 미술 작품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신, 그것을 읽으면서 임의로 띄어쓰기를 부여하고 어절이나 문장 단위에서 발음에서 연상되는 단어들을 뜻 없는 글자들 대신 집어넣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작품이 나올 수는 있다.
음악으로 예를 들어 보자. 예전에 모차르트가 마디 별로 주사위를 던져 붙이는 식의 작곡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피아노 건반 위에 무작위로 공을 떨어뜨려 나오는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는가이다. 지금은 그런 음이 나오는 대로 그대로 파일로 만들어 악보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가능성 있어 보이지만 이것도 다시 곡의 형태로 다듬도록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 손에 맡기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있게 된다. 또 글에서 든 예시처럼 난수로 피아노에서 나올 수 있는 음들을 뽑아내어 이것을 사람 귀에 듣기 좋게 재배치하는 방법도 있다.
우연이 끝이 되는 생산은 소설 쓰는 기계처럼 사람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 나올 수도 있다는 환상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 생산이 가능하느냐 아니냐의 사실 이전에 그런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구가 존재하는데 하필 내 손에 있다면?
유치원에 다닐 때, 글씨를 또박또박 쓰면서도 빨리 써지게 하는 연필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물론 우리 반 안에서. 한 명이 자랑을 했는데, 내가 빌려달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글씨 원래 느리게 쓰잖아."
"느리게 쓰는 사람을 빨리 쓰게 해 줘야지 진짜로 빨리 써지는 연필이지. 아니야?"
"아니야."
"그럼 네가 쓰는 연필은 전부 빨리 써지게 하는 연필이야?"
"맞아."
"그럼 내 연필은 전부 느리게 써지는 연필이야?"
"당연한 거 아니야?"
그리고는 이틀쯤 있다가(몇 주 지났으면 당시 7살짜리 머리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아이가 연필을 부러졌다며 나에게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느리게 써지는 연필이라서 안 돼."
"느리게 써줘도 돼."
"넌 빨리 써지는 연필만 쓰잖아."
"아니야. 느리게 싸지는 연필로도 잘 써."
"그만해. 나는 네가 연필을 안 빌려줘서 나도 안 빌려 주는 거야."
다행히 다른 아이가 연필을 빌려 준 이후 더 이상의 기억은 없다.
소설 써지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른 쪽으로 파생된 생각이 또 있다. 바로 자신이 흠모하던 작가가 사용하던 타자기, 책상, 의자, 서재 등이 있으면 더 좋은 글이 써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장소와 물건에 대한 환상.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심지어 우연까지도 실제로는 삶에서 나온다. 환경을 포함한. 그의 물건은 기분은 좋게 해 주겠지만 그의 삶을 살아보게 해 주는 것은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 물건이 아니다. 그가 글을 쓸 때 했듯이 그 물건을 사용하게 해 주는 것은 글을 쓰려는 의지를 꺾지 않은 나의 삶이자 내 머릿속에서 샘솟는 이야기이지 그의 손길이 아니다. 위약 효과도 있으니 그런 효과가 없으리라는 확언을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바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 내가 마음대로 키보드를 생각 없이(단어를 만들려는 일말의 목적성도 없이) 마구 두드리고 나서 나중에 그것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비슷한 소리나 연상되는 발음의 단어로 대체해 가면서 문장을 꾸역꾸역 만들어 가면 어쩌면 타자기에 자갈들을 떨어뜨려서 쳐지는, 혹은 난수로 만들어낸 글자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글처럼 다듬어 우연과 지능이 만들어낸 글이 될 수 있을까? 난수로 만들어낸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은 것은 아무래도 우연에 대한 환상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