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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다운 봄, 운수 좋은 날

by 루펠 Rup L

봄다운 봄날씨가 찾아왔다. 시기상으로는 늘 봄이었다. 따뜻해지고 외투의 두께가 얇아지기 시작했을 때 봄은 이미 찾아왔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봄은 우리 앞에 있는 뭔가로 가려져 있었다. 기압대가 커튼처럼 막고 있었다고 하면 될까? 흔히 온난화나 이상 기후 현상이라고 부르는 그런 현상은 원래의 계절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바로 그것 만들어낸 것일 테였다.
학창 시절 3월이 되면 아직 추운 시기였다. 그때는 축구를 하더라도 땀이 금방 식었고 교실도 왠지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새 책을 펴며 맡는 새책 냄새도 교실에서는 차가운 느낌이 항상 함께 있었다. 서점에서 맡는 책 냄새는 추위에 대한 요소가 전혀 없기에 교과서와 문제집의 첫 느낌의 기억은 다르게 남아 있다.
올해는 3월이 되고 처음에는 금세 외투의 두께도 얇아졌고 한두 번은 외투를 손에 들고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추워졌고, 어느 날에는 4월인데 눈이 왔다가 비가 오고, 흔히 봄비가 내리고 나면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된다던가 그랬지만 그 비가 온 뒤로는 다시 외투의 두께가 두꺼워졌고, 다시 따뜻해지다가 어제부터는 갑자기 더워져서 외투를 입지 않고 다니고 있다.
환경이 바뀌는 것은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되는지 감기가 걸려도 쉬이 낫지 않는다. 환절기에는 감기 환자가 늘어난다는 것도 그 연장선이겠지. 하늘의 망토가 덮이고 펼쳐지는 것이 미물과 다름없는 땅바닥의 사람들에게는 생명력마저 좌지우지한다.
날이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긍정적이었다가 너무나 긍정적인 탓에 눈이 시려 감아 버리기도 하고, 날이 차가워지면 차가운 대로 냉철하게 사물들에 대해 한두 번씩 더 생각해 볼 기회가 생긴다. 어느 쪽이든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방해될 것이 전혀 없는데, 나 역시 자연의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부할 때 집중하게 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듯이 무엇이든 가속도가 붙어서 절대속도가 올라가야 관성도 생기는 법이다. 긍정적으로 밖을 바라보며 햇빛에 비쳐 짙은 녹색이 노랑에 가깝게 빛나는 것을 보고 있던 찰나에 공기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차가운 배경이 되어 버리면, 내 생각 역시 일관성이 떨어지면서 머릿속은 공상에 다름없는, 논리나 맥락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실타래로 가득 차고 만다.
이번 주는 조금 차갑게 시작했지만 점점 따뜻해져서 오늘 완연한 봄에 이르렀다. 이것은 단순한 기온 변화가 아니라 완벽한 서사였다. 화요일에 비가 온 것은 심지어 가벼운 반전이 되었지만 관성을 이기지는 않았기에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이것을 감정에 비유해서 글을 써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미영이는 아침에 일어나 오늘 하루도 어제처럼 운이 좋기를 바랐다. 운이 나쁘다면 버스에서 내리다 헛디뎌 굴러 떨어지거나 어딘가에서 넘어져서 치마가 찢어지거나 길을 걷다가 구두굽이 빠질 수도 있었다. 운이 나쁘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운이 좋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그녀는 그런 하루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집을 나설 때까지는 아주 완벽했다. 제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졌는데,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개운했다. 가뿐한 기분으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오니 습관처럼 눌러 놓았던 토스터가 동작을 끝내고 먹음직스러운 빵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토스트와 함께 먹기 위해 커피를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하고 보니 커피 원두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래 어제저녁에 도착했어야 하는 것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그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었다. 미영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하루의 시작이 완벽하지 않다, 오늘 하루도 약간 불안하다.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는 기분도 결과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미영의 신조였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기분을 좋게 하려는 편이었는데 지난주에는 그 노력도 쓸모없는 헛짓거리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진상에게는 기분 좋게 대하는 것조차 약을 올리는 불만거리였던 것이었다. 커피 원두로 인해 운이 나쁘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카페인 부족과 그 불안이 만나면 오늘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하는 두려움으로 미영은 몸을 살짝 부르르 떨었다. 어디선가 출근 전에 이런 걱정부터 되면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오늘 하루도 망쳐서 내일 더 심하게 느끼게 되면 꼭 병원에 가자.'
불안한 마음은 빵을 다 먹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 상담에 대한 생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영이 워낙 불안한 상태로 머릿속으로 수많은 상상을 해 댔기에 그녀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타는 버스가 도착했고, 그 버스가 간격을 잘못 맞추는 바람에 똑같은 버스가 1분 전에 이미 그 정류장을 출발했고, 그래서 그녀가 탔을 때는 출근시간답지 않게 자리가 텅텅 비어서 왔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어두운 얼굴로 미영은 평소라면 생각도 못했을 빈자리에 앉아 상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회사 근처에 도착했다.
미영이 버스에서 내릴 때 횡단보도 쪽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가 났다. 미영은 그런 것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했기에 일부러 골목으로 들어가 5분 정도 더 걸리는 길로 돌아서 갔다.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떤 사람이 자기 앞으로 손을 내미는 것을 보았다. 흠칫하며 미영이 고개를 들자 대학 때 함께 토플 공부를 하던 언니가 웃었다.
"어? 언니! 아니, 여기서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은, 출근하지. 근데 왜 그렇게 얼굴이 안 좋아?"
"아, 아침에 운이 없었어서 오늘은 어떻게 되나 걱정돼서요."
"너 ㅇㅇ 다닌다며?"
"맞아요."
"그럼 이따 나 좀 보자? 점심 먹을까?"
"어? 언니 해외로 취업가지 않았어요? 잠깐 들어오신 거예요?"
"아니야, 너네 회사에서 스카우트했어. 너 무슨 부서야?"
"저는...ㅁㅁㅁ 부예요."
"오 우리 옆이네. 이따 얘기해 보자. 내가 너 스카우트해야겠다."
"저를요? 저 일하는 거 모르시잖아요?"
"내가 기록 다 봤는데 일하는 스타일이 지금 그 부서하고 안 맞아. 너는 우리 부에서 날아다닐 거야. 어때, 이직도 아닌데. 그리고 이따 얘기해 보고 내가 뻥 차버릴 수도 있으니까 무조건 기대하지는 말고."
그렇게 해서 며칠 뒤 그녀는 갑작스럽게 매일 아침을 불안에 떨게 했던 업무에서 벗어났다. 그 모든 것이 그날 아침, 원두가 남긴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고 그 운은 그 주 내내 통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오늘 이 날씨도 비현실적으로 좋다는 뜻이다. 이런 하찮은 글이라도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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