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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이자 최신이었던 타자기로 써 보는 글

by 루펠 Rup L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자판에 손을 얹고 잠시 기다린다. 뭔가가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잠시 있어 보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수첩에 글을 쓸 때조차 생각 없이 볼펜을 들고 있는다고 쓸거리가 생겨난 적이 없는데 하물며 생소한 도구를 사용하면서 그런 요행을 바라는 것은 보통 도둑놈 심보가 아닐 것이다.

타자기는 실로 생소한 도구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단위로만 생각하면 나에게는 한 자모 단위로, 그것도 받침이 있는 것과 없는 것까지 구분하여야 하는 것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이 글을 쓰고 나면 타자기로 옮기는 작업이 오래 걸렸다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판을 치는 힘에서나 한 자 한 자를 조합하는 과정에서나 메모리를 사용하는 컴퓨터를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손에 익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는 두 가지나 된다. 우선은 수첩을 쓸 때보다 훨씬 느리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잊을 만하면 나오는 오타이다. 무엇보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를 사용하고 저절로 받침이 넘어가겠거니 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 없이 치다가 받침으로 가야 할 자음이 다음 두음 자리에 찍히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실수 자체에까지 익숙해지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오타 한 번 생길 때마다, 받침 한 번 넘어갈 때마다 손이 멈추게 되니 안 그래도 느린 속도가 그 타자기를 쓰고 있는 나에게도 답답하게 보일 정도로 늘어져 버리고 만다. 물론 지금도 연습 삼아 계속 써 보려고 타자기로 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은 수첩에 손으로 쓰는 것보다 훨씬 느려서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글이 써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생각이 따라가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전자기기와 순수한 기계가 정확히 반대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타자기로 글을 쓰는 속도가 빨라진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신기할 것 같기도 하고. 수첩에 쓰는 대신 타자기로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컴퓨터로 옮겨 쓸 생각을 한다는 것인데, 자판을 이용해서 작성한 글을 다시 자판을 이용해 베껴 쓰는 것이니 말이다. 그 자판이 기계적으로 종이에 글자를 찍느냐, 전자적으로 메모리에 저장을 하느냐 외에는 손이 닿는 곳에는 그리 큰 차이도 없는데...

단지, 한글 타자기의 역사를 조금 아는 입장에서 이 도구가 최선이자 최신이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뿌듯함 같은 것은 있다. (왠지 타자기 글씨를 보니 뿌듯함에 쌍비읍 대신 ㅂㅅ이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최선이자 최신. 컴퓨터 키보드는 십 년 전 제품보다 지금 나오는 것이 구조적으로나 디자인 면에서 조금은 나을 수 있겠으나, 지금 나오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회로적으로는 동일한 기능을 하기에. 오히려 옛날에 최신이자 최선이었던 이 기계보다 내 오래된 노트북이 글을 쓰기엔 더 최신인 것이 사실이고, 어쩌면 최선에는 더 가까울 것이다. 받침을 신경 써야 해서 타자기를 사용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지금의 컴퓨터가 받침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아졌다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인 듯싶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 타자를 치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그만큼 종이를 버려 가며 연습을 했겠구나 싶다. 실제로 치지 않고는 도저히 연습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읽은, 어떤 작가가 젊을 때, 글을 쓰겠다며 낡은 타자기를 단칸방으로 얻어온 이야기도 생각난다. 그도 연필로 끄적인 것을 출판사에 보낼 때 타자기를 사용했겠지? 설마 처음부터 타자기로 글을 썼을까? 이미 타자기에 익숙한 세대라 사용법이나 기계적으로 필요한 힘이 시상에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일까? 지금 나도 어찌어찌하다 보니 생각이 희미하게나마 끊어지지는 않는 것 같긴 한데...

생각해 보면, 내게 이 타자기 하나만 들고 밀폐된 방에 들어가게 해 주고 마음껏 글만 쓰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다. 종이는 무제한 공급이어야 하겠지. 음식도 주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실 타자기는 안중에도 없겠지 싶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싶다고 글에 집중하기를 요구한다는 건데, 그런 상황에서 타자기가 문제일까. 원고지 뭉치만 넣어 주어도 감지덕지일 것 같다.

그래도 앞으로 타자기로 얼마마 잦은 빈도로 글을 쓰게 될지 모르니 오늘은 일단 정량(용지 두 페이지)의 글자 수가 얼마나 되는지나 확인해 보려고 한다. 이만큼 쓰는 데도 수많은 오타를 피하지 못했으니 그건 단순한 노력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속 편하게 믿는 게 정답일 듯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줄 간격도 넓고 글자 사이의 공간도 굴림체나 그 밖의 컴퓨터 글씨체에 비해 상당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내용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글자 수야말로 실제로는 글의 껍질이 차지하는 겉넓이인 셈이니까 알아둘 필요는 있다. 잘 쓰게 된다면 타자기로 친 글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도 좋은 이벤트가 될 것 같다. 물론 아주아주 긴 시간을 연습에 쏟아부은 후 여야겠지만. 그리고 나는 글을 쓰는 데보다 타자기 연습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전혀 없고. 하지만 언제나 시작이 중요한 법. 최소한 타자기로 쓴 글을 공개하는 경험은 한 번 한 셈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첫째 날의 의미는 충분하다.

보아하니 앞으로 적어도 한 달은 타자기를 꺼낼 일이 없을 것 같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팔도 제법 아파서.

<A4용지 한 페이지에 약 1,000자가 나왔다.>

타자기로 친 글
휴대폰의 <pure writer>로 옮긴 글. 글씨체는 타산체(Tasan_Reg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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