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훌륭한 광경을 보든 변하지 않는 사실은 앞으로도 훌륭한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항상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광경이라도 과거의 기억인 이상 거대하고 압도적인 눈앞의 장면 앞에서는 내 머릿속에만 있는, 실재하지 않는 기억일 뿐 현실이 아니다. 다시 그곳에 가거나, 혹은 내가 그 광경을 본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재 앞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것의 한계는 명확하다. 더욱더 참혹하게 이 사실을 변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그 시점에 다시 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해도 지금 본 광경보다 그 광경이 나은 이유는 단지 그 시점이 현재가 되었기 때문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현재 속으로 외부의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오고 우리는 그것을 소화한다. 그리고 그 소화되고 남은 찌꺼기는 기억이 된다. 기억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어느 정도 이상의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기억 속에 있는 대부분은 우리 안에 무의식 중의 경계심이던가 기대감 같은 형태로 이미 섞여 들어가 있다.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즉 그 장면은 시각적이라 좀 더 생생한 것처럼 느껴질 뿐, 그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기억을 애지중지한다. 시각은 현실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감각이라서일까? 시각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형태 중 가장 객관적으로 느껴져서일까? 어쨌거나 기억의 형태 또한 어느 정도의 현실이 섞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감정은 다시 되새길 수 있을지 모르나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
기억하는 대신 그 장소에 계속 가보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과거를 지금 내 눈앞의 현실로 일정 부분 이끌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등산의 재미, 마라톤의 재미, 골프의 재미, 축구 관람의 재미, 야구 응원의 재미를 한 번 느끼고 나면 계속 가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에서 현실로 느낄 때만큼 생생하지 않다는 것 역시 피부에 와닿기 때문.
단순한 기억조차 이렇게 끊임없이 현실로 끌어들여야 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끊임없이 과거에 읽은 글의 기억을 가지고 미래의 감동을 위해 새로운 작품을 찾아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각적인 정보가 아니라 시각적으로 해석한 문장에서 오는 광경이라는 것뿐, 온몸으로 느끼는 분위기와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그러므로 같은 책을 다시 읽어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시대에는 경서만 평생 읽은 사람이 있고, 서양에도 평생 성경만 읽은 사람이 수두룩하리라. 소설 역시 인생책이라면 두고두고 읽을 수 있다.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역시 두고두고 읽는 책이 몇 권 있다. 그 장면이 생생하게 다가오려는 순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책을 다시 찾아 펼쳐야 한다. 다시 문장을 읽고 그 문장이 다른 차원에 가지고 있던 차원의 문을 다시 열어 주면 나는 다시 상상에 빠져든다. 정신을 차리고 꾸는 꿈. 그렇게 생생한 여행을 하고 나면 다시 책을 덮는다. 어떤 때는 감정이 고양되는 과정을 다시 느껴야 해서 처음부터 읽기도 하고 클라이맥스가 펼쳐지는 부분만 생각이 나서 그 부분만 읽고 덮어버리도 한다. 바닥에 기다시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떳떳해서 천천히 어깨와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장면을 보고 싶어서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부터 읽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읽었던 부분을 다시 찾아 있는 과정이 산에서 멋진 광경을 보거나 혹은 숨이 차면서도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느껴지는 보람을 느낀 후에 그것을 다시 현실로 가지고 오고 싶어서 산에 거듭 오르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기 응원을 가면 갈 때마다 오늘의 경기는 좀 더 스릴 있고 즐겁기를 바라듯이 아무리 좋았던 광경을 보았어도 오늘은 더욱더 멋진 광경을 보기를, 오늘은 조금 더 보람 있기를 바라며 새로운 산에 오르듯이 새로운 인생책을 찾기를 바라며 새로운 글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는 것이다.
올라가 본 산의 리스트를 채우기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 자체에 압도되어 저절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보다 못하지는 않다. 도전의 관점과 즐김의 관점일 뿐이니까. 마찬가지로 다독을 자랑하기 위해 책을 계속 읽어 가는 사람을 뭐라고 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리스트에 있는 책을 누군가가 읽지 않았다고 해서 우월감을 표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동네 뒷산이 북한산이라 북한산만 수십 번 오른 사람이 우리나라의 웬만한 봉우리를 다 돌아본 사람보다 못할 수가 없다. 아니,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듣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새로운 인생책을 기대하며 새로운 책을 펼치는 사람과 이미 인생책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그 책만 줄곧 읽는 사람 모두 책을 펼칠 때마다 그 문장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현실처럼 불러오는 똑같은 경험을 한다. 그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일종의 썰물과 밀물처럼 이 과정을 반복한다. 한동안은 가지고 있는 책을, 책꽂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 권씩 뽑아서 읽는다. 그러다 한 동안은 책을 마구 사 모은다. 간간이 점찍어 두었던 책들을 기회가 되어, 혹은 갑자기 다른 책들과 연관되어, 아니면 광고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해서 등 새로운 책을 주문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그렇다고 책꽂이를 채우려는 목적은 전혀 없다. 이미 가득 차서 한 번씩 헌책방에 팔러 가는 불편함이 있는 때가 지난 지 한참이라서. 어쨌거나 새로운 책을 찾으려는 것, 가지고 있는 책들에 파묻혀 있는 것 모두를 간간이 하는 나로서는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을 할 수 없다. 가지고 있는 책은 가지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다시 찾아보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영화 DVD를 재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들과 이야기들을 찾아 나서는 것은 극장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둘 다 필요하다고도 필요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산에 오르는 것과 비교를 했기에 다시 산에 오르는 것과 비교하자면, 계속 새로운 산에만 올랐으니 이제는 하나의 산에 정착하라는 말이나, 오대산에 그만큼 올라가 봤으면 이제 지리산에 가 보라는 말이나 이상하지 않은가? 혹은 한 팀만 응원을 했으면 다른 팀 경기도 골고루 가서 응원해 보라거나, 야구장 분위기가 막연히 좋아서 야구장에 갔으면 이제는 팀을 하나 정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어떤가? 책을 무작정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이 나는 그렇게 들린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생책 하나를 만들어서 그것만 읽으라는 말은 없다.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이 출판계와 항상 연결이 되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