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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건조하다

by 루펠 Rup L

지난주, 볼 일이 있어 갔던 곳에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데다 근처에 교보문고가 있어서 삼사십 분정도 책을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생각 없이 관심이 가는 표지가 있는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사실 트렌드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도 아니고, 화제가 되는 책이라고 해도 그 주제가 왜 화제인지도 관심이 가지 않는 데다 혹여나 그런 책이 있다고 해도 유행이 지나고 나서 관심이 식지 않아 아직도 지난 주제의 책들을 찾아보는 중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은 유행과 관계없는 책들만 들춰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딱히 관심이 가는 책이 없는 가운데 표지가 갈색이라는 이유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책들 중 커피에 대한 책을 펼쳐 보았다. 표지가 접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펼치고 문장들을 읽었다. 구입해 가지고 가서 계속 읽고 싶어지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려놓고 싶지도 않았다. 손가락과 종이 사이, 종이와 종이 사이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열몇 페이지를 한 번에 넘기니 또다시 티틱, 서걱서걱하는 소리에 이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소리가 나면 연필로 줄을 그으며 읽었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교과서에 줄을 긋고 읽다가 중요해 보이는 문장이나 단어가 나오면 동그라미를 치곤 했다. 몇 번을 읽고 나면 교과서는 치워 두고 참고서에 있는 요약만 읽으면 되었는데, 그때쯤 되면 책에 그은 밑줄과 동그라미는 반대쪽 페이지에 마치 인쇄물처럼 흐릿한 데칼코마니가 되어 있었다. 습도가 높은 비가 오는 날이나 한여름에는 연필로 그어도, 샤프로 그어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건조한 날이어야 나는 소리. 책이나 비석에는 건조한 공기가 어울린다. 비 오는 날의 책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다. 흠뻑 젖지 않으면 딱히 찢어질 일은 없는 것이 오늘날의 책이지만 그럼에도 비가 오면 신문지처럼 약한 느낌이 든다. 그런 날 지우개로 잘못 지우면 찢어질 것만 같은. 비석도 비가 오는 날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물방울이 시야를 가리고 새겨진 글자들 안으로도 물이 들어가 공간을 채워 버린다. 비석은 오히려 햇빛이 쨍쨍해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지만 습도는 그리 높지 않은 초여름에 어울린다. 잔디와 잡초가 단단하게 말라버린 진흙바닥보다 딛고 서기 좋은 곳. 비석 위에 앉은 먼지가 훤히 보이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블랙홀 같은 존재가 되어 글자가 더 쉽게 눈에 띈다.
서점에서 두 바퀴를 돌고 십여 분이 남아 서점의 구석까지 마저 돌아보는데 프로야구팀들과 선수들에 대한 책이 눈에 띄었다. 딱히 펼쳐 보지는 않았지만 야구 역시 비석처럼 마른 공기를 계속해서 데우는 햇빛과 어울리는 스포츠이다. 야구 선수들이 달리는 코스의 흙은 비석이 놓여 있을 산길을 닮았다. 야구경기가 펼쳐지는 그 안의 소란과 응원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승부의 환호 한가운데서 그 모든 열기를 무시하고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굳이 입장권을 가지고 들어가서 하기에는 정말 쓸모없는 도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면서 느꼈던 햇빛과 더위와 흥분을 생각하면 햇빛에 잘 말린 책, 신라 시대의 비석 같은 것이 저절로 상상이 된다.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 건조하다면 기온이 높은 것은 참을 만하다. 그래서 여름에도 가끔은 제습기와 선풍기만으로 지내는 날이 없지는 않은데, 에어컨을 틀어야 할까 싶다가도 손가락을 지나는 빳빳한 책장을 느끼고 나면 굳이 온도까지 낮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 다시 페이지로 눈을 돌리면 에어컨 생각을 언제 했냐는 듯이 또다시 빨려 들어가고 만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이 있다가도 습기가 많아서 등에 땀이 흐르는 날이면 책을 당장 덮어 버리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휴대폰을 본다. 책을 읽기 싫어지는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종이책이 아직까지 인기 있는 이유는 촉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엄밀히 책은 글자만 잘 표시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굳이 전자책이라고 해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굳이 웃돈을 주고 종이책을 선택하는 이유는 촉감 때문이다. 청각은, 역시 만족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책을 펼치는 건 아니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내게 그런 촉감이 즐겁게 느껴졌던 최초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이 각인된 무의식이 그런 환경에서 글을 읽도록 나를 유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그런 각자의 최초의 기억이 있다면, 종이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최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엄밀히 같은 상황이 각자의 인생에서 자기만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닐지. 처음부터 종이책에 끌리는 인생으로 설계되어 있다면.
그래서 감각이 감성과 어울리고 계산이 아닌 단순한 상념이 되는 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자기 계발서를 읽을 때는 종이책이라는 사실이 전혀 끌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자기 계발서를 읽었을 리는 없으니까.
오늘은 그때 교보문고에서와 달리 공기에 습기가 가득하다. 휴대폰을 열어 검색해 보니 습도가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제습기를 돌리고 싶은 날이다. 순간적으로 서걱거리던 새책의 촉감이 생각이 났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 선물과 같은 공간은 더도 덜도 아닌 적당한 온도와 습도의 공간 안에 가득 찬 책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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