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글을 써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쓰고 싶을 수도 있고 표현한다는 행위 자체가 필요해서 쓰고 싶을 수도 있다. 그 주제에 대해서는 일단 글을 시작하면 정말 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때로 정확히 무엇을 쓰고 싶었던 건지도 확실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쓰다 보니 내가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이 흘러가면서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정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처음 했던 생각이 마중물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하면 될까. 왜냐 하면 이런 경우에 실제로 나중에 쓰고 싶어진 주제에만 집중하면 원래 쓰려고 한 것을 쓰다가 생각이 옆길로 샌 것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애초에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주제가 내게서 나와야 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에디슨이 수만 번의 실패의 방법을 알기 전까지는 성공의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글을 그렇게 많이 쓴 건 아니지만.
반면 쓰고 싶은 글이 있지만 그 글의 모양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름은 똑같이 "쓰고 싶은 글"이지만 하나는 주제를 알고 하나는 주제는 모르지만 형식은 아는 식이다. 여름이 되어 공포를 느낄 만한 글을 선보이고 싶은데 내가 쓰면 언제나 슬픈 글이 된다거나 하는 경우에 그 무서운 글 역시 '쓰고 싶은 글'의 범주에 들 수 있다.
사실, 쓰고 싶다고 할 때 저 두 경우가 표현이 겹치는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글 쓰는 스타일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표현이 '생각의 흐름'이듯이, 무언가를 원해서 그것을 목표로 글을 쓴다는 행위가 나에게는 아직 어려운 일이다. 햇살에 대해 쓰려고 해도 그 한 가지에 집중해서 글 한 편을 계속 이어나간다기보다 처음부터 생각나는 것을 '일단' 써내려 가다가 이제까지, 혹은 방금 쓴 부분에서 연상되는 것을 다시 쓰고 다시 읽는 과정을 반복한다. 가끔은 처음부터 곰곰이 생각하거나 몇 날 며칠 고민한 결과를 쓸 때도 있고, 혹은 미리 정해 놓은 결말을 향해 톱니바퀴들을 이리저리 올라타며 올라가듯이 생각들을 쌓아 올릴 때도 있다.
그래서 일단 많이 써 보면 나만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훗날에는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전에는 일부러 그런 것을 찾으려다가는 글을 영영 쓰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꿈 이야기를 쓸 때는 소설처럼 최대한 상세한 부분까지 기억해 내려하고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기억나는 부분들이 논리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상상으로 메우는 과정을 거치는데, 만약 누군가가 그 스타일로 소설도 써 보라고 한다거나 한다면 그 스타일이 뭔지 깨닫기 위해서는 내가 내 글들을 여러 번 읽어보아야 할 것이고,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가는 뭔가를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글을 쓰면서 일부러 집어넣으려 했다간 내 글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한 누군가(내가 아닌)의 글이 나올 것이다. 글이 만들어지는 데에도 시간이 흐른다고 하면, 그 시간을 들여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 시간을 들여 깨달아야 하는 법이다. 내 글에 스타일이 있다면, 내가 일부러 스타일을 신경 쓰지 않고 쓴 글들 가운데 스타일이 있다면 여전히 스타일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글에야말로 그 스타일이 스며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인위적으로 깨닫고 '이런 걸 독자들이 좋아하는구나.'라고 하면서 억지로 집어넣으려 하면, 말 그대로 그 요소를 글 속에 어색하게 이식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스타일을 찾는다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나는 글로써 생각을 하는 편이라서 누군가는 수도쿠를 풀고 누군가는 넌센스 퀴즈를 풀고 누군가는 십자말 풀이를 하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환상을 보는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데, 나는 그것을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한다. 그런 와중에 나만의 스타일이 나온다면 그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나온 일종의 습관일 것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뭔가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런 것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고민의 결과로 나오는 글이며 동시에 미래에도 계속될 나의 고민의 과정을 돕는 글이다. 한때 진리는 영원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우주는 생명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곳이라는 중간 결론을 거쳐서 그럼에도 생명이 있는 이유는 우주의 이치에 맞기 때문일 텐데 그러면 물리적인 대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최후에 나온 결론이 우주의 존재는 물리적인 재료의 존재이고 우주의 의지가 생명이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죽지 않고 남아 있고 싶어 하는 의지라는 것이었다. 우주에 의지가 있는 것은 생명이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는. 이렇게 연결되어 넘어가는 방식이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투영된 것일 뿐이다. 이 주제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고 다른 주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풀어 나갔을 것이다. 이 주제는 내가 고민 끝에 나온 힘든 결론을 그때그때 정리한 것이 연결되어 나온 것이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글은 고민 없이 떠오르는 대로 쓰기 대문에 또 다른 형태의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내 글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있다면 오히려 주로 쓰는 글의 종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올 텐데 아직은 나는 쓰고 싶은 글의 형태도 많고 무엇보다 글을 읽고 내 글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면 혹여 내가 글을 쓰면 어떤 모양일지 뻔히 알아서 읽고 싶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은 맞지만 쓰고 싶은 종류의 글, 쓰고 싶은 스타일의 글은 일단 써서 나오기 전에는 내가 인위적으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훈련을 했다면 가능했을까? 그러나 글이 나에게 지금보다 일찍 가까운 존재였다면, 특히 남들과 함께 읽어도 되는 글을 쓰는 일이 훨씬 일찍부터 시작되었다면, 나에게 있어 글쓰기의 의미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생각을 풀어내는 것은 엄밀히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햇빛을 받은 벚꽃 잎이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일 때, 나는 마치 벚꽃 잎이 스스로 빛을 내는 듯이 눈부시다고 쓰는 편이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고 글이 나를 이끈다. 쓰고 싶어서 쓰지만 결론은 글이 만들어 낸다. 그 글을 읽고 내가 사족을 붙인다. 글은 그 사족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또한 다른 의미가 되게 하여 나의 얄팍한 글에 깊이를 만들어 준다. 그러나 그 깊이는 실제로 깊은 것이 아니라 섀도우로 효과만 준 것뿐이다. 실제 깊이는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글을 쓸 때 인생의 주름에서 배어 나온 주름이 진짜 깊이이다. 그러나 글은 그것으로 최선을 다했다. 나는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는 것뿐이니까. 글도, 존재 자체가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