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밤이어서 소리들이 오밀조밀 모여 감자를 구워 먹고 있다. 아니 고구마일까. 멀리 퍼져 나갈 수 없는 작은 소리들이 멀리서 들을 수 없는 크기로 내 귀에 들려오고 있어서 마치 소리들끼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멀리서 들려와서 작게 들리는 큰 소리도 있고, 가까이 있는 사물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배수아 작가의 <작별들, 순간들>을 네 번째 읽는 중이었다. 수험서는 몇 번째 읽는지(회독이라는 말은 정말 싫어한다)에 따라 읽는 속도가 달라진다고 했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같은 산책길을 다섯 번째 간다고 내 걸음은 빨라지지도 않는데 시간만 줄어들지는 않는 것과 같다. 산책하듯이, 호숫가를 걷듯이, 동네 산책을 하듯이, 개천길을 따라 오르내리듯이 읽기 때문이다. 책에는 뒤라스의 <연인>이라는 책이 나왔다. 어떤 책인지 스토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만, "원본 텍스트의 소리와 리듬을 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것들이 결여된다면 책은 결코 원래의 모습일 수 없기 때문에"라는 구절을 보고 소리와 리듬이 없더라도 어떤 책인지 자체는 알고 싶다는 궁금증이 일었다. 또 같은 작가의 <에밀리 L>이라는 책도 나왔다. 많은 책들이 나오고 지나간다. 그러나 모두 읽고 싶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저 두 권은 관심이 갔다. 책 후반에 나온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는 두 번째 읽었을 때 이미 구해 읽었다. 그전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세월>만 두 번 읽어 보았을 뿐이었다.
책을 핫도그를 사면서 받은 물티슈봉지로 어디까지 읽었는지만 꽂아서 표시하고 옆에 덮어 두었다. 휴대폰을 들어 알라딘에 들어가 책을 검색해 보았다. 에밀리 L은 에밀리의 사랑이었던가 하는 제목으로 한 권, 연인은 세 권이 나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한 권, '한용운 번역'이라고 되어 있는 것 한 권, 1992년판 한 권. 민음사 책은 세로로 길어서 잘못 펴고 있으면 책등이 부러질 것 같아 잘 읽지 않는다. 펼치고 있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주어야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유이다. 그렇다고 30년 전 번역으로 읽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 화면을 채우는 팝업이 떴다. "서버 응답 오류로 로그인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는 접속 불가.
지금은 밤 열 시 십삼 분. 열한 시까지 점검을 완료한다고 공지가 올라왔다. 다행이다. 그때까지는 고민을 미루어둘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간혹 다람쥐가 먹이를 먹다가 순간 멈칫하며 귀를 쫑긋하듯이 귀를 기울인다. 멀리서 들어오는, 자동차 바퀴가 아스팔트를 훑는 소리, 버스의 엔진소리, 오토바이 소리. 바로 옆에서는 책을 읽으면서 내 오른쪽 손가락이 책 페이지를 살짝 문지르듯이 미 끌어 뜨리면서 나는 서걱거리는 소리도 난다. 풀밭에서 걷는 소리, 물에서 노를 젓는 소리, 지퍼를 여닫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는 내가 책을 읽을 때 즐겨 틀어 놓는 유튜브 소리다. 미국에서 캠핑을 며칠 동안 즐기는 브이로그, 그것도 우연히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채널을 찾아내서 책을 읽을 때 종종 틀어놓는다. 멀리서 간혹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와 종이 모서리에서 나는 소리만 듣다가 마침 책에서 호숫가를 걷는 장면이 나오는데 낙엽 위를 밟는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가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나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1992년 버전.
마음을 정했다. 배송비까지 더해도 만 원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으니까. 절판되고 다시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을 테지만 관심 없다. 프랑스어의 소리와 리듬을 얼마만큼이나 살렸을지 모르지만 관심 없다. 앞으로도 비교할 기회가 있을는지도 모르니까. 어떤 책은 나에게 순간 스쳐 지나가듯이 이야기만 들려줄 뿐이다. 어떤 책은 끈적끈적하게 팔에 붙어 잉크를 묻히고 지나간다. 얼핏 보면 그 잉크자국은 얼룩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보면 글자가 찍혀서 거울을 대면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문장들이 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내가 직접 접하기 전까지는 어떤 의미가 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책은 내가 읽지만 나를 사로잡는 문장은, 말 그대로 내가 사로잡힌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한다. 그 문장이 지속적으로 내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내가 그 문장을 종종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문장이 나를 좀먹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좀먹고 있다고 하면 조금 부정적으로 여겨지니, 빌붙어 있다고 해야겠다. 조금 더 친숙한 용어로 바꾸면, 그 문장이 나를 집사로 선택한 것이다. 최초에 내 영혼에 들어올 때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었지만 점점 살이 붙고 영리해져서 나중에는 그 문장이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어떤 문장을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제 열 시 삼십 분이다. 삼십 분 만 더 <직별들, 순간들>에 집중하다가 책을 주문해야겠다. 유튜브의 주인공은 아침에 텐트에서 기어 나와 커피 끓일 준비를 하고 있다. 또다시 그 소리와 종이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섞일 것이다. 이제 이 글이 끝나면. 이 집에서 유일하게 울리던 키보드 소리도 끝나고 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