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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힘든 말, 읽기 힘든 글

by 루펠 Rup L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대화를 오래 나누고 나면 오히려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퇴화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히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다시 나름대로 해석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대화의 과정은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 틀림없는데, 아무리 부드럽고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더라도 대화가 모두 끝나고 나면 약간의 허무함과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이다. 똑같이 언어를 사용하지만 글을 쓰거나 글을 읽을 때는 접하기 힘든 느낌이다.
요즘 들어 부쩍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몰리다 보니 그 때문에 책을 읽는 시간도,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는 시간도 모두 줄었다. 처음부터 대화 때문이라 확신한 건 아니었고, 어쩌다 혼자 고요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보통은 잘 생기지 않지만 피로감 자체는 글을 읽을 때도 가끔 겪는 일이라 조금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내 글을 다시 다듬다가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을 발견하고 최초의 의도에 맞게 짜 맞추어 수정하는 경우이다. 대화와 비교하자면, 처음 들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뜬금없게 문장을 일단 던져 놓고 수식어를 뒤에 줄줄이 갖다 붙이는 경우라던가, 스무고개 하듯이 꼬치꼬치 캐물어야 간신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전체적인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게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 피로감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것조차 눈이 감기는 듯한 강도의 정신적인 노동을 수반한다. 말이 짜임새 없는 게 하루이틀이 아닌 성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동일한 논리로 일본에서 나온 자기 계발서는 절대적으로 피하기도 한다. 제목과 내용, 앞부분과 뒷부분, 홍보와 내용 등 어디선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그 구성이 먼저 나오고 내용을 사기꾼 소리만 나오지 않게 짜 맞춘 듯한 구조가 그렇다.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책을 다 읽고 나서 곰곰이 곱씹어야 한다. 실제 어떤 내용에 대한 책이라고 홍보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책인 것도 아니다. 그런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단지 있는 것뿐, 책에서 전체적으로 다루지도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메모에 대한 책도 시간 관리에 대한 부분이 더 많았고, 공부법에 대한 이야기도 그 방법을 발견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글로 써 놓으면 1분이면 읽을 것을 자막 처리에 느릿느릿 읽는 내레이션만으로 20분을 끄는 유튜브 채널의 클래식 버전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내 경우에는, 글을 읽기 전에, 혹은 이야기를 듣기 전에 마음에 준비를 하거나 기대했던 내용이 나오면 그대로 흡수를 하고 머릿속으로 반론이 나오든 어쨌든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나오거나, 도저히 내용을 알 수 없어서 곱씹어야 하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첫 부분에서 내 글을 다시 읽는 것에 대해 쓴 이유는, 그때도 똑같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문단을 서너 번씩 다시 읽고 그러고도 계속 곱씹어야 무슨 말인지 알게 되거나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추측할 수 있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흐름이라는 것이 글을 쓸 때는 있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은 것이 틀림없는데 전혀 상관없는 문장으로 읽히는 경우 그 둘의 괴리를 좁히고 서로 연결하기 위해 들인 노력 때문인지 피로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신히 글을 완성하고 나서도 오히려 새로 그 글을 쓰는 것보다도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다시 쓰는 건 공평하지 못하다. 어쨌거나 내가 만들어낸 존재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워버릴 수는 없으니. 어차피 내가 인정을 한다고 해도 세상에서 인정을 못 받을 아이들이니 나라도 잘 다듬어서 원래의 모습을 잘 세워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림은 순간의 예술이다. 모든 과거와 현재, 내면과 외면이 한 평면 위에 동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언어는 시간 순서대로 정리가 된다. 그러므로 요소들이 부족한 상태에서 전달이 되면 그 부분이 채워질 때까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그림을 캔버스를 세우고 물감을 짜는 것부터 모든 장면을 빠르게 재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거의 20배속으로 보면 우리가 말로 전달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빈 공간이 채워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빠르게 재생한다고 해도 계속해서 덧칠에 덧칠을 반복하다가 캔버스 천을 갈고 다시 그리는 장면이 세 번 이상 반복되면 지루해서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어질 수 있다. 글도 그렇고 대화도 그렇다. 처음부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빠져 있어서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리면 읽기에 힘이 든다.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20배속으로 보는 사람은 그 그림을 그린 사람보다 힘들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고생의 기준은 절대치가 아니라 기대 대비 상대치이다. 20배속으로 보는 데 들 것 같았던 힘의 두 배가 든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보다 고통을 99% 적게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건 고생한 게 맞다.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보다 읽는 사람이 당연히 절대적으로야 덜 힘들겠지만, 애초에 글을 읽는 데 드는 수고가 글을 쓰는 데 드는 수고만큼 필요한 글이라면 그 글은 읽을 수 없는 글이므로 절대적으로 비교하면 안 된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읽을 때도 그렇다. 상대적으로 글을 읽고 나서 보람이 수고를 상쇄할 수 있는지를 비교해야 한다. 내 글을 읽을 다른 사람들, 혹은 더 이후의 나를 위해 글을 쓴 나의 연장선에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스몰토크니 그런 것보다 조리 있게 말하는 연습이 더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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