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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영화/타자기

by 루펠 Rup L

타자기의 역사를 읽다 보니 신기한 부분이 있었다.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어 타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는 점이었다. 인쇄를 하기 위해 활자처리가 되는 건 당연한데, 그 활자처리를 할 글을 알아보기 힘들어 타자기로 옮겼고, 타자기로 글을 옮겨 써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손글씨를 도저히 읽을 수 없을 때는 아예 그 중간 지점을 건너뛰고 구술하는 것을 처음부터 타자기로 받아쓰게도 한 모양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니 동양권에서는 글씨를 쓰는 것을 하나의 예술로 취급했을 만큼 글씨를 정성 들여 쓰도록 해 왔다. 한자를 사용하면 같은 문장이라도 적은 글자로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글을 쓰면, 한 음절 한 음절을 정성 들여 쓴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물이 끓듯이 마구 생기기 시작하면 마음도 급해져 글씨를 빨리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서도 정성껏 쓴다는 것은 웬만한 요령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타자기 한 대를 가지고 있는데, 잘 사용하지 않는 건 손에 익지 않아서이다. 손에 익지 않으니, 손글씨를 조금 천천히 신경 써서 쓰는 것보다도 느리다. 받침이 있는 글자를 쓸 때는 미리 받침 키를 눌러야 하고, 글자 끝마다 스페이스바를 눌러야 하는 등의 규칙은 이후에 컴퓨터 키보드를 사용할 때도 잠깐씩 헷갈리게 한다. 내가 수첩에 쓴 글씨들이 도저히 한 번에 읽을 수가 없어 아무리 빨리 써도 소용이 없게 되면 타자기의 효용성이 올라가리라. 그러나 알파벳과 달리 받침이 있는 한글은, 조금만 신경 써서 쓰면 웬만큼 알아볼 수 있기도 하다.
그 글에서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은, 타자기 자판을 컴퓨터 신호와 연결 지었다는 것이었다. 오래전에 나 역시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나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의 형태로 풀어놓는 용도인 키보드를 가지고 코딩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각종 연산을 비롯한 기능들을 실행하는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는 점이 신기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책에서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는데, 바로 에니그마였다. 전쟁의 역사에서 타자기의 결과물을 고의로 읽을 수 없게 만들고 그것을 다시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암호 해독이 엄밀하게 최초에 타자를 치는 행위에서 발생했으며, 타자기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더 나아가 에니그마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한 기계적인 연산 장치가 지금에 이르러 타자를 칠 때와 똑같은 키보드로 명령을 만들어 실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구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타자기의 무한 확장이라는 측면은 단지 타자기가 글자를 알아보기 쉽게 해 준다는 데에서 벗어나 신호 발생기로서 존재하는, 심지어 그렇게 발생한 신호로 다른 신호 발생기나 신호 처리기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과 목적성을 모두 스스로의 출력물을 만드는 기능 자체로 향하게 하는 기계가 되었다는 뜻이다. 최초의 입력이 인간의 의지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입력 장치로서의 타자 장치가 사라지면 입력장치의 위치에 있던 요소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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