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라고 하지만 아직 초기라서 그런지, 아니면 본격적인 장마전선이 남부 지방에 있어서인지 지금은 창밖으로 요란하지 않게 가벼운 비만 내리고 있다. 주룩주룩 내리는, 왠지 지루하게 이어지는 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없이 안개에 가까운 가랑비도 아니다. 빗소리는 들리지만 리듬이 없어 나도 모르게 차분해지는 날이다. 같은 가벼운 빗방울 수억 개가 머나먼 거리에 걸쳐서 한꺼번에 내려온다. 동시에 몇 개의 빗방울이 땅에 닿는지는 세어볼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주말이라 책을 펴고 글을 읽는다. 집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집안에서 들리는 제습기의 모터 도는 소리를 배경으로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책을 읽으면서 빗방울 소리가 마치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한다. 톱니가 돌아가면서 그 회전으로 인해 내 눈동자가 움직이고 차례차례 글자들이 머릿속에 입력된다.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듯이 빗방울이 머릿속에 글자들을 입력하는 것 같다. 이미 인쇄되어 있는 글자들이 글자가 아닌 말의 형태, 문자의 형태가 되어 내 머릿속에 들어가는 과정이 머릿속에 있는 것이 타자기에 얹은 손가락을 통해 종이에 찍히는 과정과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신기하게 느껴진다.
신기하다. 신기하게 느끼는 건 아주 순진한 감정이다. 사실 아무것도 신기할 것이 없다. 세상은 법칙대로 돌아갈 뿐이고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결국 결정은 선택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 중 하나를 선택한 것, 결과적으로 확률 중 하나가 실행된 것일 뿐,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기하게 느끼는 건 어린 시절, 세상의 이치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때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는 지금 신기하게 느낀다는 것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과 같은 상태라는 뜻일까? 세상의 이치를 아직 다 알지 못한 상태가 된 것만 같은 느낌.
책을 읽는다. 수능 지문을 읽듯이 열심히 읽어 가기로 한다. 오른쪽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면 책장을 넘기고 다시 왼쪽 페이지 맨 위에서부터 읽기 시작한다. 귀로는 빗소리를 듣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동시에 책에 적힌 글자들을 듣고 있다.
듣고 있다. 읽는 것이지만 결국 뇌에서는 듣듯이 처리를 한다.
그렇게 들은 문장들이 소리를 듣는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빗소리는 타자 치는 소리와 비슷하고 가볍게 톡톡 두들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얀 페이지의 뒷면에 배경처럼 펼쳐 두고 그 앞에 쓰인 글자들을 읽는다.
망치로, 마치 떡을 치는 데 쓰는 나무망치처럼 커다란 망치로 땅을 두드리면 그 자리는 움푹 들어가게 된다. 특히 진흙이라면. 그런데 똑같은 진흙에 빗방울이 넓은 범위에 걸쳐서 떨어지면 그다지 깊이 파이지 않는다. 깊이 파이는 물방울이나 우박덩어리도 있겠지만 깊이 파이지 않는 빗방울은 오늘 오는 비, 그 빗방울이다. 그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니 빗방울'들'이 떨어진다. 진흙바닥은 전혀 파이지 않는다. 그러나 톡톡 두드리는 소리는 쉬지 않고, 모든 물방울들이 함께 소리를 내는 가운데 진흙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간다. 그렇게 스며든 물방울은 더 이상 물방울이기를 포기하고 진흙 속으로...
그 이후의 진흙은 전의 진흙과 다르다. 이제 아무 때라도 마치 커다란 망치로 두드릴 때와 같이 가벼운 어린아이의 신발에도 쉽게 움푹 파인다. 수많은 물방울들은 진흙을 무르게 만들고 단단하던 진흙바닥을 자신들이 땅에 닿을 때처럼 가볍고 경쾌한 이미지를 억지로 뒤집어쓴 곳으로 만든다.
물론 내가 이 상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진흙 바닥은 경쾌할 수 없다. 망치로 두들겨야 간신히 깨지던 마른 진흙과 달리 젖은 진흙은 바짓단까지 푹푹 빠져 집에 들어올 때에도 여기저기 묻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정도가 되고 당연히 신발도 바로 빨아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에일리언이 나온다면 진흙 형태로 무생물인 척해놓고 집에 들어와서 퍼지는 그런 형태일 것이다. 마르고 나면 다시 진흙처럼 굳어버릴 테니 그 에일리언이 발견되는 즉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욕실과 싱크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 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휴대폰을 보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간다. 그러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빗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 후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한 줄 한 줄 읽어 나가는 속도에 맞추어 쉬지 않고 빗방울의 톱니가 돌아간다. 문장이 눈이 지나가는 족족 머릿속에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