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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과 편견

by 루펠 Rup L

첫인상이라는 것이 있다. 고정관념이라는 말도 있고, 편견이라는 말도 있다. 편견이 깨지는 것은 반전이라고 한다.
올해 초, 작년 말부터 수첩에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생각나는 문장이 있으면 수첩에도 쓰고 노트에도 쓰고 컴퓨터로도 쓰다가 결국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때그때 글을 써 보기에는 수첩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수첩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글은 버스 타기 전에도(버스 안에서는 흔들림 때문에 결국 읽을 수 없는 글만 쓰게 되었다), 기차에서도, 벤치에서도, 심지어 술집에서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간단한 메모를 할 수도 있지만 집중해서 한 편의 글을 쓸 때도 제법 있다.
그 처음은 방에서만 글을 쓰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필기구 파는 곳을 일주일 동안 찾아다닌 끝에 드디어 찾은, 주변에서 유일한 문방구에서 수첩과 볼펜 세트를 구입했던 몬테네그로 여행 때이었는데, 그 이후로 그때와 거의 동일한, A7수첩과 짧은 볼펜이라는 조합을 항상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사용하던 수첩은 1월 말인가에 다 썼고, 비슷한 크기로 쇼핑몰에서 추가 주문을 했었다. 두 권짜리였는데, 어느덧 그 두 권중 한 권도 다 썼고 이어서 다음 권을 쓰려다가 실수로(크기가 똑같아서) 그 사이에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주문했던 5권짜리 싸구려 수첩에 이어서 쓰게 되었다.
그 두 종류는, 우리나라에서 구입한 것은 두 권에 만 사천 원이었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구입한 것은 다섯 권에 만 천 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구입한 것은 절반도 채 쓰기 전부터 페이지가 낱장으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양장이기도 하고 크기도 있고 해서 겹치는 부분에 힘이 많이 가해졌나 하는 생각으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불편하기는 해도 표지에 고무줄이 있으니 낱장이 가지고 다니던 중에 떨어질 염려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어차피 낱장이 떨어지는 건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온 것도 마찬가지겠거니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포장을 뜯었는데, 웬걸, 지금 앞쪽을 다 쓰고 다시 뒤표지부터 앞으로 쓰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낱장이 떨어진 페이지는 하나도 없다. 편견은 있지만 단지 저렴해서 주문한 것이었는데 첫 번째 권부터 이러니 어차피 둘 다 비슷한 곳에서 만들고 유통 과정에서 국내 쇼피몰 제품의 가격만 올랐나 보다 싶은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어쩌면 지금 쓰는 것만 낱장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인지 모르니 섣불리 추가 주문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차피 지금 가지고 있는 수첩은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다 쓰겠지만 한 권이 남았을 때 주문해도 늦지 않다. 그때까지 지금 일어난 반전이 새로운 편견으로 자리 잡을지, 아니면 새로운 반전으로 기존의 편견이 강화될지 알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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