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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의 상상

by 루펠 Rup L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마치 현실 같지 않다는 말은 곧 현실이라는 것은 인정한다는 뜻이다. 현실이라는 것은 알지만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있을 법한 상황, 틀림없이 현실이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거짓말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은 모습.
빗속을 뚫고 버스가 달린다. 맨 앞자리에 앉아 앞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은 가히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비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빗줄기는 스타워즈에서의 은하 간 광속이동처럼 우리 버스를 향해 달려들었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쳐 마치 광선처럼 보였다. 그 불빛 때문에 빗줄기는 우리 버스 바로 앞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었고, 조금 먼 곳에는 빗방울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3차선 도로는 우리 버스와 비슷한 속도로 가는 자동차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앞에 있는 자동차들의 후미등에 비쳐 빨간색으로 보이긴 했지만 모든 빗줄기는 곧 하얀 광선으로 바뀌었다. 다른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방울에 반사되면서 헤드라이트 불빛의 범위가 홀로그램처럼 만들어졌다. 공중의 가로등 불빛도 비슷하게 테두리를 가진 램프로 보였고, 도로는 직선이었다가 오른쪽으로 휘었다가 왼쪽으로 휘었다가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비가 그렇게 심하게 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차선은 잘 보였고, 그 때문에 마치 버스가 달리고 있는 곳이 고속도로가 아니라 물방울로 된 터널 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폭포를 뚫고 들어가 만나는 새로운 공간, 나무 그루터기 안으로 들어가 만나는 새로운 세상, 지구 아래로 뚫고 들어가 발견하는 땅 속의 세상, 그리고 오늘 내가 만난, 공중에 멈춰 있는 물방울들이 만든 터널 속을 통과해서 나올 것만 같은 또 다른 세상.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놀랄 이유는 없다. 고작해야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거나 하는 그런 이유일테니까. 그러나 책을 펼쳐 마치 다른, 내가 몰랐던 곳에 갔다가 돌아온 듯한 느낌은 실제 그 책의 내용으로 인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나의 관념 상에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우주가 그 순간만이라도 존재한다고 한다면, 물방울 터널이나 그 터널 밖을 상상한다고 해서 비현실적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람의 상상은 하나의 활동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은 나만이 상상할 수 있는 무언가다. 똑같은 것을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누가 옆에서 아무리 설명을 하더라도 상상은 내가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내가 상상하는 세상은 내가 상상하기 때문에 그 순간 존재하는 무언가가 된다. 우리는 행동을 한다. 동물들도 행동을 한다. 식물도, 박테리아도 모두 행동을 한다. 가장 기본적인 행동은 그 자체를 유지시키는 먹는 행동이다. 그 동일한 종의 영속을 위해서는 생식도 있지만 그 개체 자체로 상태 유지를 위해서는 먹는 행동을 한다. 생식은 그 개체를 넘어선 활동이다. 거기까지 가지 않고 조금씩 발전시켜 보면, 먹는 행위를 통해 영양적, 개체의 구성요소 면에서 유지가 되지만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다른 개체의 먹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환경에서 나의 먹이와 나를 먹이 삼는 개체와 이도 저도 아닌 단순한 환경을 구분하여야 하기에 감각기관이 발달한다. 감각은 그래서 모든 생명이 생명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특성이 된다. 감각과 감각에 의한 행동, 활동 자체가 생명이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몸으로 하는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 역시 행동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면에서는 생명이기 때문에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은, 당장의 생존에 필요가 없다고 해도 그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명의 특성으로 인한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은 우리가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하는 것, 당장 물방울로 된 터널을 상상하고 그 뒤에 우리의 목적지 대신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상상 역시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뭔가를 상상하고 그리는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표현하지 않더라도 상상 자체가 우리가 생명이라고 외친다.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연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자아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은 그저 주어진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생명을 가졌기에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짜로 얻은 생명으로부터 생명력을 박탈하지 않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고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 것으로 인해 나 자신으로부터 빼앗지 말아야 한다. 생명이 있기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자 누려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생명력 그 자체인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생명력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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