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육체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먹는 것을 비롯한 행동들을 하게 된 것은 생명의 특징이므로 그 자체로 생명의 증거라고, 그리고 인간의 상상 역시 동일하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생명의 보존과 연명, 사람의 환경의 안정성 등을 위해 발전해 온 만큼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글을 쓰고 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근거라고 할 만한 것들이 하나씩 머릿속에 고개를 내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고어물에서 볼 수 있듯이 잔인하기로도 끝이 없이 진행되는데, 이것도 과연 아름다운 생명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떠오른 후 바로 이어서 생명은 아름답지 않으며 생명은 그 자체로 생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저 생명일 뿐이라는 대답이 떠올랐다. 계속해서 그러한 질문과 대답들을 원래의 글에 덧붙일까 싶었지만 곧이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생명은 스스로 생명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렇지 못하면 생식을 통해 동일한 형질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개체에게 있어서 생식은 부차적인 것이고 우선적인 것은 개체 자체의 유지이다. 그래서 밤까지 떠오르고 사라진 그 생각들은, 인간의 상상 역시 생명의 증거라는 바로 그 생각이 생명을 가졌다는 뜻이 아닐까 싶었다. 상상이란 내 상상 속에서 스스로 강화하고 지워지지 않도록, 내가 그 자체를 인정하고 존재하도록 나를 설득하고 내 생각을 그쪽으로 붙들어 매는, 물리적인 생물이 환경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성분을 먹어서 흡수하듯이 뇌 안의 여유 공간을 잡아먹으며 스스로를 유지하는 활동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수많은 사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이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세뇌는 우리나라에서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독일, 러시아, 심지어 미국에서도 사상전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찾다 보면 한 번씩 나오는 이야기가 '사상은 바이러스와 같다'는 말이었다. 사상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가 누구에게 <감염>되었는지 모르지만 연결고리가 되는 사람을 잘 찾아내어 잘라버리면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실상 지배세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조직화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사상이지만 그러한 독재행위에는 오히려 특이한 이름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그럴듯해 보이는 사상들만이 위험한 것이고 사상전을 하겠다는 사상은 그저 우리가 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소설 <1984>에 나오는 사회에서도 독재에 반대하는 사상은 '치료'를 하여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스스로 유지하기 위해 숙주를 선택하고 그 숙주 '안에서' 연명을 한다. 어떤 사상 또는 생각이 한 사람을 사로잡으면, 그 '안'에서 살아간다기보다 설득되었을 경우에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숙주 안에 들어갈 때와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는 기능을 유지한다는 것인데, 자본론을 읽은 사람을 예로 들면, 그 사람이 결론적으로 그 책을 건네준 사람의 사상에 설득당해 단지 그 책을 '좋은 책'으로 인정하는 상태인지 정말 그 책의 내용 한 구절 한 구절에 동의하는 상태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겉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그 책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사상전에는 금서 목록이 필수였고, 실제로 손에 잡히지 않는 전선은 그렇게 해서 암살 무기가 주머니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목격하는 것처럼 가방을 뒤져 어떤 특정한 책이 있는지 검사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독재의 도구로서의 사상전에서 대규모로 일어나는 바람에 발생한 개인차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이 다른 사람의 정신에 들어가 어떻게 설득을 하고 어떻게 강화가 되는지는 역시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공통적인 과정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그 이야기가 약속하는 미래세상이 되었든, 현재의 상태를 비토하는 것에 단지 동의할 뿐이든 자신이 스스로를 설득할 재료는 충분히 들어 있는 셈이다. 그 상태에서 그 사람을 설득하는 그 생각을 정확히 꼽을 수 있다면, 그 생각에 대해서 우리는 사상전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당연히 정확히 꼽을 수 없다).
생명은 아름답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은 하대할 수밖에 없다. 이타적인 것은 아름답다. 개와 사람의 에피소드, 다른 사람을 위한 고귀한 희생(과 그것을 고귀하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아름답지만 생명에는 위배된다. 생각도 나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육체적인 나이자 육체적인 나에 묶여있는 호르몬의 노예이고, 생명을 가진 생각은 어떻게든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성질만 있지 육체적인 나이자 육체적인 나에 묶여있는 호르몬의 노예를 어떻게 호르몬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인지와 같은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려면 그런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보와 지식은 정보와 지식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 지구에서 미네랄이 땅과 바다 여기저기에 섞여 있는 것과 같다. 생명이 있는 생각은 그런 지식들도 하나씩 수집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접한 우리는 다시 설득당할 것이다.
나는 어떤 생각을 내 머릿속에 살아가게 할 것인가. 나는 내 머릿속을 정글처럼 아무 생각이나 적응만 하면 살아갈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목장을 만들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그 목장에서 생명을 향한 투쟁을 하지 않은 여유로운 생각들에서 나올 것이다. 그 생각들은 조금 직설적인 근거가 필요하면 빳빳한 풀을 뜯어먹을 것이고, 약간의 독설을 섞어야겠다 싶으면 버섯이나 고사리를 조금 뜯어먹을 것이다. 생각 자체가 다른 생각들과의 사이에서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싶으면 호수에 가서 물을 마실지도 모른다. 열댓 개의, 내 글을 응원하는 생각들이 평화롭게 거닐다 바쁜 일상의 태풍이 몰아오면 콘크리트로 지어 물에 잠기거나 무너지거나 벼락을 맞을 염려가 없는 쉼터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내가 억지로 떠올리려고 해도 아무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야 그 순간은 답답하겠지만, 일상을 보내면서 내가 깊이 빠져 있던 생각을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으니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내 상상의 공간, 뇌 속의 여유분을 생각들의 생명 유지를 위해 내줄 용의가 충분히 있다.
언젠가 목장에 가보고 싶을 때가 올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글을 쓰고 난 뒤에. 그리고 나면 생각 하나에 소 한 마리를 짝지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소도, 그 생각도 모두 어리둥절해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