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살면서 일도 빌딩숲에서 하다 보면 마치 계절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지나갈 때가 있다. 추울 때는 보일러와 온풍기가, 더울 때는 에어컨이 항상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태풍이 와도 건물 안에 있으면 어느 정도 위험은 줄어든다. 한때 태풍 곤파스 때문에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헬름 협곡이 공격당할 때처럼 한 장 창문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워낙 큰 피해가 있던 태풍이라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단지 맞바람 때문에 베란다와 주방 창문의 섀시가 휘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창문이 터져 대피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을 때, 집이, 건물이 전혀 안정감을 주지 못했을 때에도(조금씩 흔들리는 느낌이 있긴 했다) 그 직전까지는 집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생각에 출근길만 걱정했었고 혹시나 지금도 그런 상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간간이 든다는 것뿐이다.
어릴 때는 비가 많이 오면 마당에 고이는 물을 대문 밖으로 퍼내고는 했다. 지금도 바람 부는 장마철이나 태풍 때는 출근길에 온몸이 바짝 젖어서 사무실에 들어가기 일쑤이다. 겨울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빙판이 있을까 봐 조심해서 걷는다. 건물 안은 단지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오랜만에 습도가 높아서 에어컨을 틀었다. 더위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습도가 높으면 견디기 힘들다. 한여름 해수욕장에서는 습하고 더우면 그대로 물속에 들어가면 된다. 정말 더울 때는 집에 있다가도 그대로 냉수샤워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더운 게 아니라 습도가 높아서 땀이 날 때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핸드폰을 보니 오늘은 습도가 10%라고 나오는데도 이상하게 더웠다. 잊고 있던 욕실의 온습도계를 가지고 나와 보니 습도가 67%를 지시했다. 에어컨을 켜고 제습 모드로 바꾼 후 희망온도를 30도로 지정했다. 밖은 습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것이고 밤이지만 덥기도 여전할 것이다. 열대야가 아니니 괜찮으려나. 겨울에는 춥더라도 건조하기 때문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는 기분이 날씨에 그다지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눈이 오고 뽀드득 거리는 발자국 소리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다. 여름에는 잔디밭을 밟을 때 기분이 좋다. 겨울에 눈이 펑펑 왔을 때가 기억이 난다. 눈 밟는 소리는 좋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치우지 않은 곳이 모두 얼어서 눈을 밟아도 미끄러웠다. 차도는 염화칼륨을 모두 뿌려 놓아서 괜찮았지만 인도에는 뿌리지 않은 곳이 더 많았다. 다행히 집에서 버스 정류장이 멀지 않아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가기로 했었다. 혹시나 밤새 눈이 들이치지 않았나 실외기실을 들여다보았다. 가을이 되어 에어컨을 더 이상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실외기실 창을 모두 닫긴 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실외기실 창을 모두 닫아놓은 상태로 에어컨을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바로 가서 실외기실을 열어 보니 후끈한 공기가 나를 밀어내듯이 한 번에 몰려나왔다. 급히 실외기실 창을 열고 실외기실 문을 닫았다. 온습도만도 아니고, 창문을 열어 놓고 살 수 있는지도 아니고 단순히 실외기실 창문을 열어 놓아도 되는지 여부를 살펴야 한다는 사실조차 우리가 계절을 무시하고 살 수 없다는 증거이다.
러브액추얼리에서 소설가가 호숫가에서 타자기로 글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도 없는, 수면이 흔들리는 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글을 쓰는 것, 그 정도까지 다지 못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같은 자리, 같은 장소이면서 하루 중 같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주변에 신경을 조금만 쓰면 옆에서는 빗줄기가 창문을 깨뜨릴 듯 내려치기도 하고 끊임없는 눈송이의 행렬이 지옥을 향하듯 바닥을 향해 이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같은 책상에서 글을 쓰면서도 어제보다 높은 습도에 불평하는 하는 것도 어쩌면 대단한 특권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집안에서 같은 자리에 책상을 놓고 그 자리에 컴퓨터를 놓고 글을 쓰는 상황이라도 다른 집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갑자기 정전이 되는 일이 잦았는데 지금은 그런 일도 없으니 많은 것들이 당연한 것이 되어 간다.
글을 쓰는 사이에 습도가 많이 내려가서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습도계를 보니 58%를 가리키고 있다. 이 정도 상쾌해졌으면 30%까지는 떨어졌겠다는 생각에 습도계를 본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변화에 예민하구나 싶다. 실외기실은 이제 마음껏 에어컨을 틀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올해 첫 에어컨은 제습모드로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202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