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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글의 존재의 운명.

by 루펠 Rup L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무는 내가 보고 있는 줄 알고 있을까. 모든 사물과 모든 의식은 연결되어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모든 독립된 형태의 사물에는 의식이 있고 그 의식은 종류에 따라 서로 통할 수 있고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모두 통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와 나는 원칙적으로 통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나무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고 나무 역시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수시로 돌아다니는 존재들에게 관심이 있을 턱이 없다. 물론, 내가 그 자리에 있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무 입장에서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혹은 모든 것에 관심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사백 년을 살았다면, 그 앞으로 지나가는 나와 같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았을까. 실제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나무가 보기에는 나 역시 400년째 그 앞에서 지나다니고 있는 같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구분을 하겠지만 한 명씩 다닌다면 각각이 다르리라는 것을 전혀 대화도 하지 않고 존재도 다르면서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를 구분할 수 없듯이 나무가 보기에도 모든 사람은 똑같아 보일 뿐만 아니라 생각을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나무와 수명과 죽음의 작용이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해 얼마나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양을 보며 글을 쓴다. 그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쓰여진다. 그 누군가는 나 하나뿐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겠으나 그 대상이 어떻게 되거나 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글은 읽히기 위해 태어났으나 글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글 자신으로는 종이 위에 펼쳐진 글자들의 배열일 뿐이고, 그나마도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볼 여유도, 이유도, 방법도 없다. 다만 기호대로 떠들고만 있을 뿐. 떠든다는 점만 다를 뿐 나무와 글은 거의 같다. 나무는 다 자라면 땔감으로 쓰거나 다른 동물, 곤충들의 서식지가 되지만 글은 그 정도의 쓸모도 없다. 혼자서 지르는 그 소리를 누군가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은 나무보다는 별에 가깝다. 자체적으로는 불구덩이(별은 태양 같은 항성이니까)에 불과하지만 누군가가 보기 때문이다. 몇억 년이나 가야 하는 이곳에서 보는 우리는 별에게는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성체이다. 아니, 별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열과 빛을 내고 있을 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 환경이 된다. 별도, 나무도 하나의 환경일 뿐이다. 주체적으로 존재하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별을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무 역시 우리가 관심이 없을 때는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내 글 또한 그렇다. 읽혀도 읽히지 않아도 그 글은 그 자리에 쓰여졌을 뿐이다. 무덤가에 놓인 비석처럼 그 자리에 있지만 오랜 기간 있다 보면 그냥 있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 그 안에 쓰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학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글을 쓰면 그저 그 글은 그 자리에 있을 뿐 그 내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읽어보면 내용을 알게 될 뿐, 내용 때문에 요란스럽게 읽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오늘 쓴 글도 오늘 자를 통해 형태를 얻었을 뿐 사실은 그 자리에 몇억 년 전부터 존재해 왔을 수 있다. 눈으로만 보지 못했을 뿐, 오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고 태초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존재들은 그 자리에 있어 왔고 있게 되었다. 나무 역시 태초부터 공간적으로 이 자리에 시간적으로 지금 '있어왔다'. 별들 역시 그 자리에 지금 있어왔다. 내 글 역시 종이 위에 태초부터 지금 쓰여 있도록 되어 있어 왔다. 나 역시 그 글을 쓰게 되리라고 정해져 있었다. 이 우주가 만들어지는 순간, 나무가 흔들리는 모양을 보고 별을 떠올리며 곧바로 내 글의 운명을 상상하는 나 역시 만들어졌고, 지금에 와서야 그 모습이 형태를 갖추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보통의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모든 것이 이 우주가 생겨난 이상 그렇게 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은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제야 만난 것이 아니라 수십억 년 전, 나는, 그녀는 이제 와서 만들어지도록 되어 있었고 그때가 되어서야 만나게 되어 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하게 비껴나갈 수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만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필연에 전율이 등줄기를 꿰뚫고 지나간다.
내 글은 삐뚤삐뚤한 글씨로 마치 어린아이가 간신히 포스터에 그린 불조심 문구처럼 나름 쓸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보기에는 유치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그 글이 이 자리에 내가 있듯이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래야 '이 글이 쓰인 건 내 실수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쓸데없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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