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ㅣ ㄹ ㄱ
읽다.
오래된 책을 펼친다. 너무 오래되어 책등이 꺾여 책을 펼치기만 해도 알아서 활짝 펴지는 페이지가 있다. 자연스럽게 오른쪽 페이지 위에서 다섯째 줄, 한 줄을 띄우고 새로운 문단이 시작되는 곳으로 눈이 간다. 읽는다. 페이지를 넘겨서도 가운데 부분까지 읽고 나서야 책을 덮는다. 표지만 넘긴 후 조심스럽게 책의 시작 부분을 찾아간다. 제1장. 그 세 글자를 제외하고는 온통 여백인 페이지를 넘기자 맨 위에 1이라는 숫자가 있고 가운데부터 문장이 시작된다. 이를테면,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라면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가 있었을 것이다. 여백 없이 시작하는 책도 있을 수 있고 있는 책도 있지만 우리는 그 여백조차 "읽는다".
여백을 읽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여백은 작가가 지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지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독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여백이 나왔기에 음악에서 쉼표가 하듯이 한숨을 내쉬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단지 종이 낭비라고만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단순한 쉼표, 휴지의 개념보다도 연극에서 한순간 모든 조명이 나가고 나서 다음 무대를 준비하는 부산한 "분위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모든 것은 그 책을 읽는 과정 속에 포함이 된다.
읽는다는 글자를 보면, 내(ㅇ)가 손(ㅣ)으로 책을 넘기며 글자들을 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글자들로는 알아볼 수 없는, 그 내용을 파악해야만 보이는 미로(ㄹ) 속을 돌아다니면서 단순히 헤매 다니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스토리든 교훈이든 분위기든 무언가를 마음속에 긁어서 새기는(ㄱ) 과정이 생각난다. 읽는다는 말이 아니라 '읽"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생각나는 것들이다. 글자는 개념을 대표한다. 그 개념은 글자로 변환한 상태에서 엮이고 그 뒤에 다시 개념으로 돌아가 보면 역시 똑같이 엮여 있다.
한편, 읽는다는 글자를 보면 '늙'이라는 글자도 생각난다. 점점 불편해지고 누워지는 몸(느)을 이끌고 계속해서 세월의 풍파 속(ㄹ)을 헤쳐 나가고 그러면서 세상에 긁혀(ㄱ) 상처를 받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는 모양이 그려진다. 그것은 너의 인생이기도 하지만 나의 인생이기도 한 우리의 인생이다. 읽는 행위가 많아지는 것은 실제의 풍파 속을 헤매고 실제의 상처를 받을 필요 없이 시뮬레이션을 거칠 수 있는 과정이 된다.
이것은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읽는다는 말은 책을 읽는 데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에서 신문기사와 논문까지, 심지어 얼굴의 표정을 살펴도 우리는 모두 읽는다는 동사를 사용한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나면 화살은 '낡'으로 향한다. 이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우리의 물건에 대한 동사이다. 우리가 모두 죽고 나서 우리의 물건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을 험하게 읽어서 책이 쉽게 낡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단지 그 책에서 마음이 일찍 떠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오래 머물수록 집이든 책이든 더 오래 상태를 유지한다. 마음이 떠나면 그 책은 쉽게 낡는다. 불의의 사고로 책이 낡는다면 적어도 그렇게 낡기 전의 상태를 그리워하기라도 하게 마련이다. 책을 험하게 읽는다는 건 없다. 남의 책이라 함부로 하거나, 한 번 읽을 때 온몸으로 최선을 다하거나 둘 중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책은 표지가 꺾이고(ㄴ) 파이거나 찢어지고(ㅏ) 구겨지고(ㄹ) 접힌다(ㄱ).
이 모든 것이 ㄺ이다. 그리고 이 모든 ㄺ 받침은 자연이 인간을 내려다보며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 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맑은 하늘로.
맑은 하늘의 느낌은 다르다. 아직도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교과서가 생각난다.
맑은 하늘
파아란 맑은 하늘
맑다는 말은 분해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는 모양 그대로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한 '맑시즘' 역시 내게는 똑같은 이미지로 반대의 영향을 끼쳤다. 맑은 하늘과 비슷한 글자여서 너무 이상적으로 보인다는 판단이었다.
우리는 늙어가며 책을 읽고 우리가 읽던 책은 낡아간다. 문득, 책등이 꺾여 있고 나는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었구나, 하고 깨닫고 창밖을 내다볼 때, 오늘도 하늘이 맑다는 것을 깨닫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