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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도구

by 루펠 Rup L

도구라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도구 자체, 즉 도구라고 사용되는 것들 안에는 위대함이 없다. 사용되면서 유용함이 증명될 뿐이다. 도구는 다른 도구에 의해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있다가 없어서 불편함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간접적으로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나 위대함은 도구를 사용하는 데에 있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느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도구를 대체함으로써만이 도구의 의미가 있다.
동물들은 보통 입을 도구로 사용한다. 도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머리에서 생각한 것과 물리적 세계 사이의 매개체인데, 뭔가를 이동시키기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행동은 잡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보통의 동물들은 잡는다는 행위의 필요성을 턱의 힘을 조절해서 감당한다.
해양생물들은 조금 다를지 모르겠다. 그러나 육상 생물에 한정되어도 문제가 없는 게, 이제는 곰을 다룰 차례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손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손을 사용하면 좋은 점을 생각해 보라면, 잡는 행위가 뭔가를 먹는 행위와 분리된다는 점일 것이다. 또, 양손과 입을 합하면 한 번에 한 번만 할 수 있던 일을 한 번에 세 가지를 할 수 있게 된다. 곰의 경우에는 입으로 물을 내려치지는 않지만 손으로는 내려쳐서 물고기들을 튕겨낸다. 간혹 그렇게 튕겨 나온 물고기를 입으로 덥석 물기도 한다. 본능적으로 앞다리와 입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입이 뭔가를 들기에 적합하지 않다. 돌출이 별로 되어 있지 않은 점도 있고, 입으로 뭔가 들어간다는 것은 90% 먹는 행위라고 뇌에서 인식한다는 뜻이다.
손이 모든 것의 도구였던 시절, 손을 도구라고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을 '손으로' 든다, 무엇을 '손으로' 잡고 당긴다, 무엇을 '손으로' 잡고 던진다 등 손으로 수많은 일을 했겠지만 그것이 도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돌칼이나 돌도끼 등 손에 들고 손의 연장으로서 사용되는 도구가 만들어지고 나서야 그 도구들이 연약한 손가락이라는 도구를 대체하는 도구라는 인식이 탄생하고 나서야 성립했을 것이다. 그래야 '한 가지를 대체하는 도구를 만들 수 있으면 대체하는 그 도구를 대체하는 더 나은 도구도 만들 수 있다'는 데에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상태에서 사람들끼리 싸우는 데 사용하는 무기를 만들면서 그런 인식이 다시 사라졌을지 모른다. 사유는 실용의 논리 앞에서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도구의 개발이 멈추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실용의 논리에서 도구는 경쟁을 가속화하는 단계에 올라 현대에 이르렀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 도구에 대한 사유는 환상의 형태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마법처럼 글을 써주게 하는 펜, 자동으로 글이 써지는 타자기, 조금 더 부드럽게 여행을 하게 해 주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 단순한 손과 발의 연장에서 이제는 우리 몸을 떠받치는 일상으로서의 도구들이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그 환상에서 사람이 도구의 도구가 되는, 도구가 일종의 기생충이 되고 사람이 숙주가 되는 그런 두려움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 나올수록 낡은 것으로 천대받고 새롭고 긍정적인(편리한) 것은 절대선인 것처럼 환영받는 것은 인류가 항상 겪어온 일인지 모른다. 경제 공황은 한 번 겪었지만, 전 유럽이 두려움에 떨면서 미신에 사로잡히는 것도 한 번만 있었던 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긍정의 힘' 등으로 포장된 성공학 운운하는 분야에 필적하는 과거의 '즐거움의 힘' 등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씁쓸함에서 나온 동화가 '빨간 구두'가 아닐까 싶다. 즐거움이 최고이고 그래서 손에 넣었지만 결국은 그 즐거움을 강요하는 데에서는 사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그에 반해 디즈니의 '마법사의 제자'는 제자가 어설픈 마법으로 자동으로 청소를 시키다가 온 집을 물바다로 만들어 결국 스승에게 혼나고 스승이 원래대로 돌려놓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도구로서의 마법, 도구로서의 청소 도구들보다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의 자질과 능력에 한 표를 던지는, 아주 바람직한 예시인 것 같다. 도구 만능주의에 걸친 발을 빼는 이야기. 아이폰을 쓰면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인다, 어떤 학습지가 공부하기에 더 좋다 등 도구가 사람의 능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은 많지만 중요한 건 본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도구가 어느 정도 강화하거나 도와줄 수는 있지만 대체할 수는 없다. 도구가 대체하는 것은 손가락처럼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다른 도구이지,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다간 빨간 구두처럼 그 사람이 쓰러지고 만다. 이와 관련해, 가장 유용한 도구인 돈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변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의 성향은 원래 존재하고, 돈은 그 성향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돈을 벌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경우는 없고, 원래 나빴지만 그것이 발현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가 돈이 생겨서 본성이 그 틈을 비집고 나온 것뿐이고, 돈을 좋은 곳에 쓰는 사람도 돈이 없을 때 못했을 뿐이지 돈이 생겨서 사람이 착해진 것이 아닐 거라는 뜻이다.
여기서 도구에 대한 찬양을 똑같이 사람에 대한 찬양으로 그대로 옮겨오면 영화화된 소설, '리미트리스'처럼 약물을 통한 능력의 고양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말했듯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환상이다. 스스로를 잃어버리면 도구는 도구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떤 도구를 쓰면 글이 더 잘 써질지 몇 년 동안 바꿔가면서 써 보았는데, 결국은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눈앞에 있는 사인펜과 휴지라도 집어 들게 마련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도구가 많으면 쓰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그 주제에 맞는 도구를 골라 쓸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확실히 그건 장점이다. 같은 글도 수첩을 꺼내 볼펜으로 끼적거리고 싶을 때가 있고, 키보드로 치고 싶을 때가 있다. 큰 화면으로 기계식 키보드를 철컥거리며 쓰고 싶을 때도 있고 휴대폰 화면으로 보면서 글을 써도 충분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어 글을 쓸 때는, 특히 잊어버릴까 겁이 나서 얼른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냥 손에 잡히는 것이 우선이다.
요즘은 볼펜을 별로 사모으지 않는다. 한동안 이런 볼펜, 저런 볼펜을 사 보고 써 보고 바꿔 보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0.28mm짜리 심 열 개를 쟁여두고 그것만 쓰고 있다. 다 쓰게 되면 또 찾아볼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볼펜만 쓰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빨리 찾아올 일은 아니다. 도구를 고르는 일은 그 자체로 재미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딱히 글을 쓰는 데나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두세 번째가 되면 책에 이것저것 메모를 하고, 즐겨찾기처럼 내가 좋아하는 구절에서 참고할 만한 다른 구절의 페이지를 적거나 눈에 띄지 않게 오자를 교정하거나 하는데, 그때 사용하는 0.28mm 볼펜만으로 충분하다. 책에는 본문보다 작은 글씨로 메모하는 것이 본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이지만, 그것도 그렇고 나중에 읽을 때도 편의상 웬만하면 메모는 가상의 정사각형 안에 다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 도구들을 보다 보니 0.1mm짜리 펜도 있어서 그걸로 메모를 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아직 0.28mm짜리가 너무 많아서 기억만 해두고 있다.
글이 잘 써지는 타자기, 글이 술술 나오는 키보드 같은 것에 대한 환상은 항상 가지고 있다. 사람이니 쉬운 길을 바라는 건 어쩔 수 없지 싶다. 그렇지만 내 글이 내 글이 되기 위해서는 내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마법 같은 타자기와 키보드가 있어서 자동으로 글을 쓴다면 나중에 내가 그 글들 중에서 정말 내 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몇 %나 될지 모르겠다. 인공지능에게 맡긴 작품의 한계도 그렇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내가 내 글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그것을 내 글이라고 판매하는 것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구는 절대로 주체를 넘어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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