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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생각. 그저 빛날 뿐 아름다울 수는 없는.

by 루펠 Rup L

빈 화면 앞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는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게 무엇일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곰곰이 생각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일단 무엇이든 써 내려가면 사방에서 흐르는 시냇물들이 결국 산 아래에서 커다란 강과 만나듯이 내가 쓴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생각의 끝은 결국 일정한 방향으로, 중력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 생각의 끝이 주제라면,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틀렸다. 주제는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주제가 아닌 '그것'을 찾기 위해 글을 쓴다. 아마도 내 글들은 주제를 타고 그것을 찾는 여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글에 있어서는 단지 그 여정을 만들어 주는 장치에 불과하겠지.
반지의 제왕에서는 우연히 프로도가 손에 넣게 된 반지를 모르도르의 용암산에 던져 녹여버리는 것이 목표이다. 내가 주제를 타고 그것을 찾아가듯이 반지는 (스스로야 당연히 원하지 않지만) 프로도를 따라 용암산을 향한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을 모두 읽고 나서 주제가 프로도의 여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 군상의 본능적인 이익 지향성, 뜻하지 않은 우정,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가는 사랑, 욕망에 사로잡혔다가 풀려나는 기적 등 각 부분마다 존재하는 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그 부분들에서 프로도가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줄거리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게 해 주기는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나는 창문 바로 아래에 책상을 붙이고 창문을 열어놓고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 창밖에서는 목표를 잃은 이런저런 소리가 울린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간간이 섞여서 자동차 경적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타이어 구르는 소리, 오토바이 엔진소리, 아이들이 공 차는 소리 등. 누군가를 향해 이야기를 하는, 정보가 실린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낸 주체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는 부르는 소리들. 저절로 나는, 나도 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르는 그 소리들은 내가 써도 쓰지 않아도 아무도 모르는 내 글과 닮았다. 그리고 내 글은 그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또렷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존재는 있다는 뜻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 하는 생각은, 존재하는 것일까? 나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그 생각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의가 없다. 존재의 정의가 아니라 아무도 잡지 못하고 표현하기도 힘든 그 생각이 존재한다고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옷을 입히고, 설명을 해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생각은 존재하는 것이고 어떤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생각에 존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일까?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사상이라고 해도 결국은 각자의 생각이 바뀌거나 애초에 받아들인 개념이 서로 달라 사회운동 자체가 갈라지는 사례를 우리는 수두룩하게 보아 왔다. 어떤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동의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정치처럼 애초에 모두가 협의의 대상이 되는 생각이 아닌 이상, 또는 내가 뭘 쓰고 싶었던 걸까, 처럼 나 이외의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가치조차 없다고 말을 해도 딱히 반박할 수 없는 생각은 내 머릿속에만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것도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은 은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우리의 뇌 속은 우주이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곧 내 뇌 속 우주의 물리 법칙이다. 뜨거운 사막의 밤, 낮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온도까지 곤두박질친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 하늘에서 쏟아질 것처럼 무섭게 내려다보는 은하수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우리 뇌 속의 우주에서는 은하가 하나만 있는 것도, 생각의 씨앗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리라. 그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안의 별은, 우리가 이 우주를 닮은 존재라면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별도 만질 수 없듯이 우리도 생각을 만질 수 없다. 또렷하게 묘사할 수 없다. 어떤 파랗게 빛나는 별을 파랗게 빛나고 성분이 무엇 무엇이라서 파란색이고 질량이 얼마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진홍빛 노을 속에 홀로 파랗게 빛나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듯이 우리 안의 별들도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지만 그 밖에서 묘사할 수는 없는 일다. 다만 빛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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