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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의 작품 : 과거

by 루펠 Rup L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죽어서 남긴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더라도 누군가 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준다는 전제하에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어차피 나를 기억한다는 말은 불가능한 명제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아는 사람들은 세종대왕의 업적을 아는 것이지 세종대왕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름 석 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이 남기고 싶은 것은 '나'에 대한 것이지 나와 관계없는, 오히려 나의 이름이 단지 어떤 일을 한 사람이 실제로 살아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증언해 줄 수 있는 역사책의 주어 이상의 기능은 없게 되는 그런 문장이 아닌 것이다.
나는 우주가 모든 순간이 쌓여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우리가 과거라고 말하는 것, 현재라고 말하는 것, 미래라고 말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시간의 최소 단위라고 하는 그 시점마다 영상을 이루는 사진 프레임처럼 쌓여간다고 생각한다. 미래는 가능성들의 모임이니 아직 형체도 없겠지만 적어도 현재가 만들어지는 순간 그것은 뒤로 쌓이게 된다.
내게 그 이미지는 양탄자를 짓는 것과 비슷하다. 여러 색의 실들이 모여 있지만 그 실들이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른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순서대로 꼬이게 되고 마침내 동시에 당겼을 때 실들이 모여 한 줄의 현재가 탄생한다. 그렇게 쌓인 과거들은 이미 짜인 양탄자의 그림이 되고 그런 식으로 양탄자가 끝까지 완성되는 것이다. 미래는 그 실들이 아직 모이기도 전이다. 현재는 한 줄의 그림이 모이는 시점이고, 다음 칸이 만들어지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된다. 그래서 누구도 그 과거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주에는 현재 이전의, 지금까지 짜인 미완성된 양탄자의 모습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태로 존재는 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는 내가 지나간 현재들이 모여 있다. 아마도 필름 한 장 한 장에 빛을 비추어 영화를 상영하듯이 양탄자를 놓고 한 줄 한 줄 따라가게 되면 과거를 다시 살아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단 나를 주체로 바라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나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이다. 눈으로 보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 소리로 듣는 것, 냄새로 맡는 것. 눈으로 보는 것은 대부분의 정보가 들어오는 통로이다. 그 자체로 의미가 없고 그저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감각 그 자체가 되는 길을 열어준다. 정보로서의 시각은 그 정보에만 집중하게 한다. 정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현재만을 대표하는 배경 같은 풍경은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외 다른 생각들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새소리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생각 속에 잠겨서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는데, 아마도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작용하니 조금 더 나를 누르는 힘이 생긴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감각의 물속에 잠겨서 스스로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다고 해도 그 물은 너무나 얕아서, 맛있는 음식의 냄새만으로도 모든 다른 감각을 이기고 벌떡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나 달콤하면서도 그렇게나 쉽게 깨지기 때문에 명상에 대해서도 그렇게나 많은 말이 있는 거겠지. 나는 명상은 해본 적은 없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가만히 있는 경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법 자주 즐긴다.
나의 의지라고는 그 자리에 있고 싶은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채로 눈에 들어오는 대로 풍경을 바라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듣고 피부에 와닿는 대로 바람과 기온과 습도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이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과 생각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는 그 상태를 누리고 있다 보면 나중에 우주에 남아 있는 과거처럼 내 인생에서도 과거라는 것이 하나의 물체처럼 남아있다면 그 부분은 마치 수정처럼 투명하고 부드러운 모양이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에 이른다. 무언가를 쌓아가거나 일정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로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쓰면 결국 그 한 부분에만 치우쳐져 균형이 맞지 않게 되거나 모양이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데 아예 그런 것이 없는 고요한 상태에서는 그 어떤 자극도 가해지지 않는 드넓은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놓은 그 모습 그대로를 표현해 보고 싶다. 내가 내려놓았을 때의 느낌 그 자체가 아닌, 그 느낌을 전염시킬 수 있는 글, 읽으면 초원을, 숲을, 호수를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읽고 있다는 그 느낌조차 부차적인 것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내가 내 안으로 가라앉아 있는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체험이 되는 글. 내 몸 밖에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모험만큼이나 생생하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뿐인 그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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