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가까이 붙어서 걸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사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기에, 절벽에 가깝게 붙어서 걸었다고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넘어져도 절대 떨어질 리 없을 그런 거리였으리라. 그러나 땅 아래로 보이는 허공은, 죽음에 대한 상념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허공을 나는 느낌과 그 느낌 끝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미처 상상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온 머릿속을 가득 채울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기억들.
사실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보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보이는 풍경이라는 뜻인데, 과거에는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이 말을 타는 것 외에는 상상하기 힘들었기에 그렇게 이름 붙였겠지만, 아무리 빨리 지나간다고 해도 그렇게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열차 옆에 있는 나무를 스치는 순간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을 타든 자동차를 타든 우리는 포착하기 힘든 가까운 것보다는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볼 만큼 적당한, 혹은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아침 조회 시간에 쓰러지면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앞이 노래지면서 현기증 같기도 하고, 모래를 뿌린 것 같기도 한 거칠고 노란 장면으로 시야가 순식간에 '교체'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암전이 있고 나서 분명히 일정시간 지난 후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아직도 시야는 어두운 노란색이 배경인 흑백이었고 나는 기차에 타고 있었다. 호기심도 들지 않았고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운 좋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라보았고, 그 칸에 나 혼자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기차가 나 때문에 운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앉아 있는 좌석 옆 창문에만 유리창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좌석은 붉은색 벨벳이었고 통로와 천장의 마감은 모두 목재로 되어 있었기에 혹시 기관차도 증기 기관일까 하는 궁금증에 유리창 없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증기기관차가 저 앞에 있었다. 내가 탄 칸이 기관차와는 네댓 칸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잘 보였던 것 같다. 그 순간 앞칸 어디에선가 밖으로 던진 것인지 필름 하나가 내 눈앞으로 지나갔다. 필름이라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갈색으로 된 필름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필름이 지나가면서 내 눈앞에서 영상으로 재생되는 것 같은 효과가 났는데, 그 전날 집에서 학교에 가기 위해 가방을 메고 나오는 장면이 있었고, 곧이어 다른 필름이 지나가는데 일이 년 전 돈을 모아 나름 고급스러운 샤프를 구입한 장면이 지나갔다. 그리고 몇 개의 장면이 더 지나간 후 열 살 때, 이모님 댁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계단 난간에 올라가서 미끄러져 머리부터 아래로 떨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을 난간에 댄 채로 양팔로 물구나무서기 하고 있던 장면으로 이어졌다.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필름의 장면에서도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구도였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네 살 때 그리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던, 당시의 내게는 매우 컸던 경찰차 장난감이 보였다. 그리고는 기차가 터널로 들어갔고 더 이상 필름이 눈앞에 지나가는 펄럭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잠시 후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고 전원을 내린 듯 모든 것이 멈추었다가 다시 정신이 들고 누워 있는 채로 나는 눈을 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생각해 본 바 없다.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죽음 전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많지만 결론이 난 것이 없다. 죽음을 정의할 수 있을까? 독창성 없는 삶이 곧 죽음이다, 생기 없는 삶은 결국 죽음과 같다 등 말은 많지만 공감이 가는 것은 딱히 없다. 무언가 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하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 과목만 공부하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대다수의 학생들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모든 글은 생명이 있다. 어떤 글은 수없이 읽히고 어떤 글은 조금만 읽힌다. 계속해서 읽히지 않는 글은 죽은 글일까. 수천 년을 뛰어넘어 이제야 읽히는 수메르의 쐐기문자로 쓴 글들은 죽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읽어 보아도 지금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기에 읽히더라도 단지 껍질뿐인 죽은 글인 걸까. 주역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주역이 단순히 오래된 글이어서 유명하다고. 무슨 말이냐면, 주역보다 더 오래된 두꺼운 책이 있었다면 그 책도 시간이 가면서 결국 점치는 책이 되었을 거라고. 점치는 책이 되면 생명은 오래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책에 있어서 생명일까. 어떤 사람이 두고두고 읽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은 살아 있는 것일까. 책에 있어서 죽음은 어떤 느낌일까. 아니, 책이 아니라 글이다. 글에 있어서 죽음은. 처음부터 죽어 있는 글은. 어쩌면 글은 애초에 죽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읽고 싶은 것을 읽고 읽고 싶지 않은 것은 읽지 않는 인간의 특성상 글은 단지 장식 같은 것인지 모른다. 독창성 있는 글은 내용이 독창적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랑받을 요소 같은 것은 글 안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글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글이 죽음을 맞이할 때 눈앞에 흘러가는 것은 글의 서두 부분일까, 혹은 초기 독자들의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