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가정을 세워 보았다.
환생을 한다면 그 구조는 어떨 것인가. 인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관점이라면 드라마 도깨비에서처럼 서너 번 환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인간의 관점이다. 인생을 붙잡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다시 살고 싶어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관점이다. 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점이다. 그래서 제한하게 된다. 제한이 있어야 소중한 게 인간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 인생을 한 번 살아갈 뿐이고 환생을 하더라도 고작 세 번 더 사는 것에 불과한 생이기 때문에 소중해지는 것이다. 희소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아이디어.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 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의 연장선일 뿐이다. 축구경기에서 선수교체 기회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하지만 대회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경기의 규칙은 경기 중에만 중요하다. 우리가 환생을, 이곳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생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떠나게 되면 어떤 규칙을 받게 될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여기를 떠나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이곳의 규칙은 지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본다고 하자. 그런데 드라마가 특이하다. 드라마 상영 시간이 20분인데 오프닝이 10분이다. 건너뛰기도 되지 않는다. 10분 동안 열심히 오프닝을 보지 않으면 자동으로 드라마는 꺼지고 작품 선택 화면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보기 싫더라도 반드시 오프닝까지 모두 보아야 한다. 한두 편이면 호기심으로 그럴 수 있지만 20편이 넘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면? 아마도 넷플릭스에서 먼저 퇴출시켜 버리지 않을까?
우리가 노년에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그 의미뿐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의미를 다시 깨닫기 위해 하나의 생을 더 살아내라고 한다면 어떨까?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다시 젊음을 찾을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아기로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신나게 살아내고 그 나름의 인생의 의미를 지니고 세상을 떠났을 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니 한 번 더 살아내라고 한다. 조금 망설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한 생을 살면서, 아니 한 생까지 갈 것도 없이 이십 대만 살아 보아도 천지 사방에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고 두 명을 갖다 놓아도 인생의 의미를 똑같이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러니 인생의 의미를 수많은 사람들의 관점으로 다 느껴보기 위해서는 그런 삶을 모두 살아 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간직한다는 목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모르는 무한한 과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 리는 죽음 뒤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 뒤에서는 우리가 단지 무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무대 뒤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무대에서는 대사만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는 막이 닫히고 난 뒤에야 배우의 인생을 살 수 있다. 그전 까지는 배우가 맡은 역할만 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하나의 과제를 상정한 제목일 뿐이지만 아마 이러한 인생을 굳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끝까지 가야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라는 것 외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런 정신적인 대상이 아니고서야 죽음 뒤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없을 테니 돈이나 물건은 절대 아닐 거고 말이다. 그래서 단지 인생의 의미라고 지칭할 뿐인 그것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라면, 새로운 내용을 보기 위해 그 절반이나 되는 시간 동안 오프닝을 보고 있어야 하는 드라마보다 훨씬 비효율적인, 인생을 살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노동이 된다. 인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면, 인생이 수단이 된다면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지루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게임으로 비유를 하자면, 게임 속 아이템 하나가 하늘을 나는 기분을 실제로 느끼게 해 주는데, 그 아이템을 얻기 위해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만 그것이 세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실제로 그 아이템을 얻고 나면 십오 분 간만 활성화되고 다시 세 시간을 들여서 얻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면 그것은 결국 기억과 감정의 총체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인생을 살아내기 전에는 하나의 의미를 온전히 얻어낼 수 없고, 그렇게 그 의미를 가지고 가도 또다른 인생을 통해 또 하나의 의미를 얻어내야 하는,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라 단지 결과만을 수확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되면 비로소 억겁의 세월 동안의 환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생은 좋은 것이 아니다. 생이 좋은 것이 되려면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생에서 얻는 무엇이 아니라 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에서 그런 관점을 깨달았다고 해도 중요한 건 죽음 이후이다. 죽음 이후에 우리가 생에서 한 행동들이 단지 의미의 수확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판명되면 우리는 또다시 살아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론은, 죽어보기 전에는 어떤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든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한들 가 본 사람이 한 이야기라도 가보지 않은 우리가 그 이야기가 실제로 가 보고 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고 심지어 가 보지도 않고 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단지, 사람으로서의 삶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을 우리가 바란다면 그것은 단지 이 삶 속에서 생긴 고정관념일 뿐이고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그만큼 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며 심지어 태어남조차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내는 것은 의무이다. 어차피 살아가는 것인 이상 최대한 기쁨 속에서 살아야 좋아 보이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죽음 이후, 태어남의 이전에 있었을 거라고 상상한 무한한 삶 속에서 지루함을 느낀다면 무한함을 잊고 지금의 삶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