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창구, 세계의 씨앗

by 루펠 Rup L

표현은 나의 내면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다는 두 가지 기능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감정, 느낌, 심지어 지식까지 작품에 쏟아 넣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심지어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나 또한 낯설게 느껴보고 싶어서 끄집어내고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털어놓지만 무엇인지는 모르는 무엇. 이것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종교적 체험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과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할 때와 뭔가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는 것을 그리거나 만들어내려고 할 때의 두 가지 경우에는 감정적인 고양이라거나 감동 같은 부분에 있어서 똑같을 수는 없어도 공통분모는 엄연히 존재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본인은 그저 우연의 효과라고만 설명한 것이 실제로는 그러한 효과를 '실험'한 것이 아니라 본인조차도 자신이 표현하려고 한 마음속의 어떤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없으니 그나마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본인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아닌가,라고 하기에는 본인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본인은 정말로 우연의 효과를 노렸고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왔을 뿐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무의식 상태에서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연에 기대어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얻고자 한 것이 없이 작품을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연에 기대어 만들어낸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실은, 우연에 기대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데에는 계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들어 내야 하고 팔아야 하기 때문에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이라는 명판을 붙이는 데에는 분명히 기준이 있을 수밖에 없고 하다못해 자신의 눈에 하자처럼 보이는 게 있는데도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게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른 관점에서의 이의가 제기된다. 본인은 그리고자 하는 효과가 모두 나타난 작품을 완성했지만, 감상하는 사람이 그 표현이 모두 마음에 들지만 한 군데 하자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고,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수만 명의 사람이 하자라고 해도 작가는 그것이 하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효과가 아님에도 그 효과마저 작품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관성이 없다. 전체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그 부분은 용납할 수 없고 그 작가를 아는 입장에서도 그런 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작가가 그 부분이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조화롭기는 하다는 설명만 듣고 납득을 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 이유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작가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막연히 표현하고 싶은 느낌이 있었을 뿐이고 완성하고 보니 작가 자신이 도저히 더 이상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는 더 좋은 그림은 그릴 수 없을 것 같다고 할 때, 그것을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이것이 그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해 주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이 지점에서 나는 미술은 소통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소통일 수도 있지만 소통이 아닐 수도 있다. 표현도 나름대로 할 뿐이고, 감상도 나름대로 할 뿐일 수도 있다. 소통은 인간이라면 누구든 즐거운 일이 된다. 상대방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은 욕구도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세히 설명을 하려고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모호하고 안개처럼 형체가 없어지게 되면 더 이상 듣기 힘들 정도로 짜증이 나는 것일 테다. 듣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설명하는 사람 스스로도 기운이 빠지겠지만. 그럼에도 "한 나뭇가지에 난 싹이 그 지방의 평야를 설명하고 있다."라는 문장이 지금 그 문장을 지어낸 내 머릿속에 있는 풍경과 갑자기 저 문장을 읽게 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다를 수 있지만 그 문장은 그저 그 자리에서 양쪽의 편차를 오롯이 받아내고 있는 것, 교집합이라기보다 그 두 가지 풍경이 모두 압축되어 들어 있는, 그리고 실제로 저 문장을 읽는 것이 단 한 사람이 아니라면 읽는 그 숫자만큼의 세계가 저 한 문장 안에 압축되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림 역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한 장의 그림일 뿐, 그리고 조각품 역시 우리 눈앞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의 물체일 뿐 실제로 그 작품이 그 수많은 세계들을 마치 씨앗처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설명이 필요할까? 심지어 작가가 생각하고 있던 세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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