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심지어 컴퓨터 게임을 하는 데 있어서도 '익숙해진다'라는 말은 곧 자기만의 스타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은 졸졸 흐르는 물이 결국 땅을 파서 하나의 실개천을 만드는 일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이것을 전형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또한 인위적이면서 또렷한 형태를 지닌 어떤 것에 비교하자면 템플릿이 아닐까? 템플릿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형식을 배우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나를 맞추는 것과는 달리 오랜 시간 나 자신과의 타협점에서 깎이고 다듬어진, 그야말로 나만의 전통을 만드는 일이다. 글을 쓰는 스타일도 서술어들의 배치를 따라 해 놓고 그 안에 들어가는 단어만 바꾸는 것이나 형식을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지만 반복해서 서술어들의 배치가 나타나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똑같아 보일 수는 있겠으나 템플릿과 전통은 엄연히 다르다. 템플릿은 형식을 부르는 말인 만큼 형식이 우선시 되는 것이고, 전통은 내용이 흘러나오는 방식이 반복하다 보니 일정한 형식을 띠고 있을 뿐이다. 그 형식이야말로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라고 하면 그 사람만의 전통을 가리키는 말이겠으나, 단어로만으로는 템플릿과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지칭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개천의 모양이 그 실개천을 가리키거나 묘사하기엔 가장 좋겠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물이 어디서 내려오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흐르는 것인지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림을 보는 방식에 있어서 여러 관점을 알게 되었다. 그 그림 내면에 포함된 색채의 배치에서 오는 느낌을 감상하기, 그림의 메시지에 주목하기, 색과 관계없이 구도에서 오는 느낌을 감상하기, 그림의 작가와 연계해서 감상하기 등. 미술사와 별도로 평론사 역시 몇백 년을 내려오는 것이기에 몇 달 동안 접해 온 내가 다 알 수도 없겠지만, 실제로 감상은 감상하는 법보다 감상한다는 사실이 나 자신에게는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었기에 나름 이런저런 그림들을 접해 본 결과, 나만의 그림을 보는 전통도 약소하게나마 생겼다. 내게 있어 가장 쉬운 방식은 그 그림을 그릴 당시 작가의 환경을 고려해서 그 지식을 하나의 필터로 사용해서 그림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많은 그림 해설들이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했고. 그렇지만 모든 그림이 어떤 환경에서 자란 작가가 어떻게 지내는 시기에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현대 미술 작품들은 그런 설명도 부족할뿐더러 르네상스 시기나 그 이전의 그림들처럼 설명이 많아서 쉽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그림만 보고 감상을 하게 되었는데, 내게는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들도 그 방식의 감상이 나와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도 하나의 암호 푸는 게임일 뿐, 그림의 본질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한 내게는 작가야 어떻든 그림이 그 자체로 가진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나만의 방식, 나만의 전통이라는 것은 오랜 시간 지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일이 년에 불과한, 개월 수로 세는 게 더 정확할 듯한 그 시간 동안 그림들을 보면서 내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을 정말 내 방식이라고 말해도 될까 싶지만 내 방식이든 내 전통이든 시간이 가면서 굳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곧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뜻이기에 어차피 30년이 지나면서 굳어진 방식조차 그다음 1년 동안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므로 상관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그림이 주는 색채의 느낌을 감상하는 편은 아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한 번에 첫인상이라는 게 없지만, 첫인상이 없는 것이 누구에게든 격의 없이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쪽이다. 그림에 있어서도 첫인상은 느끼기 힘들다. 전체적인 배치를 먼저 본다. 지극히 이성적이다. 그러고 나서 구성 요소들을 하나씩 보기 시작한다. 그 요소들 사이의 무게감을 보기 시작하고 2차원적인 배치로 변환해서 생각한다. 추상화가 되었든 종교화가 되었든 똑같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시선이 배치에서 요소들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스토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내 방식이자 전통이다.
여러모로 글이 시간 순서대로 처음에서 마지막으로 사람의 언어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한 것이고 글을 읽는 것도 그 문자를 해석해서 시간 순서대로 읽어 나가고 상상하는 것인 것과 반대로 그림은 한순간의 장면 안에 스토리를 한 번에 녹여낸 것이라는 것이 평소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가가 압축해서 집어넣은 그 스토리가 내가 보는 순간 한 번에 쏟아 나와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내 인식으로는 그 쏟아져 나오는 스토리 전체를 받아줄 만한 능력이 없고, 그러니 결국은 부분 부분을 보면서 글을 읽듯이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이곳에는 무엇이 있고, 저곳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러이러한 그림이다,라는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아니다. 내 눈에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과 같다. 반드시 필요하다면 언젠가 보일 것이다. 한 번만 본 그림이라도 어쨌든 나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본 것일 거라 생각(인연이라고 해야 할까?)하기에 급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림조차 글을 읽듯 읽어 나가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가끔 그림을 취미로 그리지만 그릴 때도 스토리처럼 배치하지는 않는다. 그릴 때는 하나의 장면에 때려 넣는 일을 잘한다. 어쩌면 그래서 남에게 보여줄 만한 그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