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상상

by 루펠 Rup L

그림을 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다가도 점점 새롭게 보이는 것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특별한 모양이 없었다고 해도 점차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이 있게 되고, 구체적인 모양이 그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첫눈에 보이던 것에서 조금 더 들어가서 자세히 보게 되거나 혹은 그 뒷이야기가 보이게 되기도 한다. 호숫가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가도 멍하게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에 시간이 금방 가 버리고 나면 기분은 좋아지지만 무엇을 본 것인지, 무엇에 정신이 팔렸던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작용이 그림을 볼 때에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현실을 잊고, 그 작품 밖에서 벗어나 작품 안을 거닐어 보는 것이다. 풍경을 감상할 때에도 몸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들에 정신이 팔리면 이리저리 거니는 것과 똑같은 작용을 한다. 그림을 볼 때에도 가만히 서서 그림을 들여다보든 앞뒤로 움직이며 조금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조금 멀리서 한눈에 보기를 반복하든 우리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그 그림 안에서 거닐게 된다.
오늘 그림을 그렸다. 대단한 그림은 아니고, 지난주에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던 접시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상상 속에서 마치 초전도체 박물관처럼 공중에 세로로 붕 떠 있는 접시와 어두운 배경만 생각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그리기 위해 신경 써야 할 일이 대단히 많았다. 재료야 단순하게 오일파스텔을 사용했지만 어디를 칠하고 어디를 어떻게 그릴지 같은 것들 하나하나가 막상 손을 대려고 하니 막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대략적인 구조는 짜 놓았기에 집중해서 그릴 수는 있었는데, 다 그리고 나니 그린 과정이 마치 그림을 볼 때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쳐다본다. 보지 않고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석공이 돌을 보지 않고 깨 나갈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보지 않은 것 같다. 분명히 나는 눈앞의 종이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상상 속의 그 접시에 정신이 더 많이 팔려 있었다. 입체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딱히 집중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도 접시의 모양, 색깔, 배경에 계속해서 집중을 했고 그렇게 하나하나 정하다시피 관찰의 결과가 나와야 다른 색의 오일파스텔을 집어들 수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어느 색이 부족한가를 보고 다시 집어 들고 칠하고, 접시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상상 속의 그 모양과 비슷할까를 생각하며 다시 집어 들고 칠했다.
다 그러고 나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내 그림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잘 그렸으면 계속해서 자랑스러워했을지 모르겠지만 잘 그린 것도 아니었고 상상 속의 모습을 똑같이 옮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조금 더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흰색과 갈색, 빨간색의 비가 내리고 그 빗줄기들을 수없이 가로지르는 이끼와도 같은 초록색. 마치 샤넬의 트위드 무늬처럼 교차하는 배경은 속도감이 있어 보이다가도 자세히 바라보면 공중에 붕 떠 있는 정적인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가운데 떠 있는 접시는 지금 각도로는 접시가 맞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접시라고 생각을 하고 바라보면 어두운 곳에 있는 도자기 같기도 하다. 가만히 기다리면 오른쪽으로 회전할 듯 하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니 회전하면 접시의 모양이 확실히 보이거나 더 접시답지 않거나 할 것 같다.
그림을 다시 보는 과정에서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상상했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의 사물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게 사람인지라 여느 그림을 보듯이 뜯어보고 멀리서 보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다 그림을 치워버리고 나자 비로소 상상 속의 그 접시들이 다시 떠올랐다. 이래서야 상상했던 대로 그림을 잘 그린 게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그림을 관찰하는 과정이 다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 그 그림을 어떤 과정으로 그렸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배경을 먼저 그렸을까, 모델은 어떤 사람일까. 그런데 지금은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화가들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을 그릴 때 상상했던 그림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림을 비교할 수 있을까? 내가 상상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남들과 다르거나 혹은 훈련이 덜 되어 있어서 안 되는 것인지, 개인차가 있는 것인지, 혹은 원래 그런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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