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변경을 넓히는 과정

by 루펠 Rup L

인생을 살면서 충분히 살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고. 다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모든 일에 대한 레퍼런스가 내 경험 속에,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 쌓여 있어서 오래된 서류뭉치 속을 뒤지면 언젠가 답이 있으리라 생각이 드는 그런 단계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경제 문제들은, 특히 금융 문제들은 그로 인한 위기를 느꼈던 세대가 대부분 사라지면 그 기억도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다시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곧 사람들의 수명이 500년이 된다고 해도 그 문제가 발생하는 주기만 길어질 뿐, 공황처럼 발생할 일은 언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 안에 수많은 내가 있어서 그런 기억들을 서로 공유해 주지 못하는 그런 게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지혜라고 불렀던 그런 것이 금융에 있어서는 아직 생기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축적된 경험으로 생기는 지혜에 대한 이런 생각은 초창기,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매우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어떤 문장으로 만들어도 완전해 보이지 않는 어렴풋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대략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공부를 하고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배우는 목적도 있지만 사회생활을 미리 맛보고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과연 익숙해지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어떤 단계든 인생을 살면서 내 삶 속으로 튀어나오는 사람들은 간간이 적응하기 힘든 경우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익숙해진다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에 익숙해진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연습으로, 맛보기로 그런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 천성적으로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정말 익숙하다는 느낌이 있으려나.
그 질문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죽음은 모든 종교에서 나름의 관점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수많은 종교들의 교차점이다. 아마도 모든 종교에는 진리가 두 가지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대학시절 어느 여름방학 때 한 적이 있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음이 있다는 것. 어떤 종교 교리에서도, 어떤 경전에서도 주인공인 우리들, 사람과 나름의 관점을 제시하는 죽음은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목적은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종교의 대상이 우리 '사람'들이라는 것과 죽음을 인정한다는 두 가지는 동일하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죽음 이후에 대한 관점도 바뀌는데, 내가 느낀 것으로는, 죽음은 하나의 점이고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곡선을 그릴 수 있어서 그 곡선이 죽음의 점에 어떻게 진입하느냐에 따라 죽음 이후의 선도 정해진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죽음의 점을 향해 내리막을 그으면서 들어가면 죽음 이후에도 그 선은 계속 내리막길인 셈이다. 이것은 윤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삶과 죽음을 잇는 직선이 하나의 반사경이어서 양의 구역에서 진입하면 좋은 쪽에 머무르고 음의 구역에서 진입하면 나쁜 쪽에 머무르는, 혹은 죽음 이후에는 반전되어 있는 그런 식일 뿐 연속성이 인정되는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왜'가 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종교마다 정해진 것이 없다. 나름 교리에 빠지지는 않지만 정해진 것은 없다. 보이는 것만 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왜'라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직접적인 부분이 되는 핵심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본체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 모든 일이 왜 생겨나고,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관점이 정해지면 그 관점에 의해 저절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이 실제로는 본체다.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그 앞부분이어서 교리나 규율에 더 신경을 쓰게 되지만 실제로는 죽음 이후에 대한 관점 때문에 모든 것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들이 죽음 이후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교리가 다른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은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 이후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를 믿거나 심지어 종교를 창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으로 돈벌이를 하며 이번 생을 풍족하게 살았을 것 같다. 그리고 심지어 그런 사람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알지 못한 한 가지 변수가 더 있었다. 믿음체계는 그 자체로 믿음 체계를 떠받친다는 것. 종교단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단체가 존재해야 한다. 쉽게 비교하자면 기업이 있다. 흔히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처럼 멍청한 소리가 없다. 사람은 먹고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인생의 목적이 연명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존하는 것은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삶의 목적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살아있는 것이 목적이라면, 누군가를 죽이고 그 돈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더라도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목적을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적을 침해할 만큼의 행위를 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기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윤을 내며 스스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는 순간 다른 사람의 목적을 침해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사람이 만든 기업 역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윤은 기업의 태생적인 생존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종교단체의 목적은 종교 교리의 수호와 포교이다. 그렇지만 존속하고 나서야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기업에서 목적을 빠뜨리고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존만 보아 범죄를 눈감아주려는 사람들처럼, 종교단체 역시 교리를 수호하고 포교한다는 목적만 보고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은 자꾸 보지 않으려 한다. 종교단체를 꾸려가는 것은 핵심 인물들뿐만 아니라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 교리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 때문에 새로운 해석이 계속해서 나오고 다른 설명이 하나씩 덧붙을 수 있다는 점을 한참이나 지나서 깨달았다. 죽음뿐 아니라 그 이전의 '세상' 역시 교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생각의 진화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변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생각이 바뀌어온 개인적인 경험을 되짚어 보면 변질은 좋은 것이다. 생각이 썩어서 한 군데 붙잡혀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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