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다. 작은 책상이 있지만 의자는 없다. 책을 잠시 살피는 곳이지 책을 읽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창문이 있지만 항상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고 햇빛이 들 때는 창문으로 해가 보이지 않는 시간에 책의 먼지를 털기 위해 블라인드를 잠시 걷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때뿐이다.
책들은 주로 소설과 에세이이고 간혹 시집도 있다. 모두 저자별로 분류해서 꽂아 놓았지만 같은 저자의 책들 사이의 순서는 따로 없다. 종교서적은 이곳에 없다. 거실에 따로 모아서 꽂아둔 곳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그냥 읽는 책이지 찾아보거나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꽂이의 가장 높은 곳에는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있다.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를 비롯해서 소설가들이 인터뷰하거나 글 쓰는 과정에 대해 쓴 에세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아직 그런 서재가 없는 지금도 그런 책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 구입하고 읽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을 사도 작품들 자체보다 그 작품들을 쓴 이야기를 더 집중해서 읽으니.
그리고 그 아래에는 소설책들이다. 작가별로, 혹은 SF만 모아놓은 구간이 있다. 특정한 작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다시 보고 싶어 읽는 경우가 많기에 두고두고 다시 읽는 책이 대부분이다. 말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도 번역가별로 구비하지는 않는다.
아래쪽으로 가면 미술책들이 있다. 그림들이다. 책들이 무겁기 때문에 아래에 꽂는다. 꺼내다가 떨어뜨려도 책이 최소한으로만 상하게 하려는 배려에서 그런 거지 잘 꺼내지 않아서 바닥에 깔아놓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글을 쓰고 나서 읽어보면 그 글의 문체나 분위기는 직전에 본 그림에 좌지우지하는 때가 많다. 단순히 창밖을 내다보고 나서 비 오는 차가운 느낌이 스며들 때도 있고 눈 오는 가운데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림을 보고 포근한 느낌이 가득한 글이 나올 때도 있다.
책이 있는 장소는 이렇다. 서재라기보다는 서고인 공간. 그리고 그 옆에는 글 쓰는 방이 있다. 책들 사이에 둘러싸여 글을 쓰다가 참고할 게 있으면 바로 펼쳐 보는 것도 효율적이기는 하겠지만 나는 책을 꽂아두고 잠깐씩 펼쳐볼 수 있는 서재처럼 글 쓰는 공간도 책에서 독립적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 쓰는 방은 필방이라 하면 좋을까? 글자가 새겨지는 각자방? 이름이야 그때 가서 지으면 될 것 같고, 중요한 건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노트북과 키보드 정도만 간신히 올려놓을 수 있는 책상 두 개가 전부인 방. 글 쓰는 도구가 책상 하나, 읽을 책, 또는 참고할 책이 책상 하나를 각각 차지하고 나를 위한 의자가 하나. 이것이 그 방의 전부이다. 드라마 셜록에서 '애플도어'의 코어가 의자 하나 간신히 들어가는 두 평짜리 방이었듯이. 이미 누군가가 쓴 책들이 아우성치는 가운데 "너도 뭔가 써 봐."라고 하는 듯한 그런 모습 대신 조용한 가운데 스스로에 집중할 수 있는 책상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책상에는 바퀴가 있어서 때로는 창문을 향해, 때로는 벽에 붙어서 눈앞에 바깥의 풍경을 펼쳐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해 준다. 그렇게 방 두 개면 충분하다. 대신 크기는, 책을 꽂는 곳은 책의 권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을 읽고 쓰는 공간은 오며 가며 본, 지하철 역이나 버스 정류장의 신문가판대가 있는 매점 크기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여기도 욕심을 부리자면 한도 끝도 없는데, 가끔 잠자리에 들 때면 글을 쓰는 나만의 공간 같은 것을 상상하다 잠이 들곤 하는데 가장 현실성이 없으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새하얀 벽지와 새하얀 천장, 새하얀 타일 바닥이 있는 한 20평쯤 되는 공간 한가운데에 책상과 의자만 달랑 있는 모습이었다. 그 넓은 공간이 내가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하면서 상상을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는데, 그 모습 또한 상상 속의 광경이므로 내가 상상을 멈추면 사라진다는 점에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