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잡고 첫 문장

by 루펠 Rup L

자리를 잡습니다. 책상이든 바닥이든 어디든 괜찮습니다. 그리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글을 쓸 준비는 끝납니다. 특별한 의식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세만 잡으면 첫 문장이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물론, 항상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쓸 때는 저절로 생각나는 첫 문장만큼이나, 나머지 문장들, 심지어 결말까지도 글이 도달할 때까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개하지 못하는 글은 대부분 이렇게 쓰여집니다. 하지만 수첩에 글을 쓸 때도 그런 것이 글을 쓰는 묘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지요. 때로 노래를 틀어 놓고 멍하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앉아 있는 건 당연히 "할 일이 있어서 책상에 앉았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누워 있는 건 추운 겨울날, 방바닥에서 뜨끈한 부분, 보일러 배관이 지나가는 부분에 손발을 대고 누워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손발도 중요하지만 옆구리나 등, 허벅지 등도 뜨끈한 배관을 느끼게 해야 특정한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골고루 생각을 퍼져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멍하게 있다 보면 생각은 마치 망상을 하듯이 제멋대로 뻗어 나갑니다. 과거 일이 생각나면서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억울하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날은 틀린 겁니다. 그런 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한 번 튀어나오면 절대 재미있는 생각으로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알맞은 자세로 자리를 잡고 생각에 잠깁니다. 생각은 다른 생각을 낳고, 생각과 생각 사이를 생각이 넘나들기도 합니다. 아까 한 생각에서 하나의 꼬투리를 잡아 다른 생각으로 넘어왔는데, 그 두 생각 사이에 연관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경험에 대한 회상 사이에서의 공통점일 수도 있고, 우연히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일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저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우연에 가깝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유롭게 진행되도록 관찰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이 마음대로 진행되다가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하나씩 기억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저절로 며칠 동안 기억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기록을 해야, 그 기록의 근처라도 기억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잘 압니다. 물론, 글을 쓸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기억할 이유도 없습니다.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야니고, 그것을 잊어버린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래도, 글을 쓰고자 할 때 쓰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제 생각을 따라간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꿈입니다. 꿈 역시 제가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사이에 마음대로 뻗어 나가는 생각입니다. 물론, 신비로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말 그대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생각을 관찰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꿈을 기록해 보지 않을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어디선가 꿈도 기록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 기록을 한두 번 해 보았는데, 한두 번인 것에 비해 너무 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꿈 내용이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하고 놀랄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꿈을 소설 형식을 빌려서까지 되도록이면 생생하게 기록을 하려고 합니다. 그건 특별히 감추거나, 비밀로 하거나, 이상하다고 욕먹을 일이 없기 때문에 브런치에서도 매거진으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꿈처럼 생각도 자유롭게 흘러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분위기, 문장 등이 나오곤 합니다. 자주는 아니고 그렇다고 요행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만, 꿈과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반드시' 일부러라도 키워야 하는 건가 싶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판을 깔아 줍니다. 그리고 의외로 신나는 일이라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부탁하여 하루에 삼십 분 정도는 키보드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갖겠다고 이야기를 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퇴근길에 대한 글을 쓰고 한참 후에 멍하게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신기하게도, 핸드폰으로 글을 쓸 때와, 본격적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고 잡는 자세에서 글을 쓸 때는 글의 질감이 다릅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읽으면 큰 차이는 아니지만, 사포로 갈아낸 방향이 다르다던가,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카페나 지하철에서 키보드를 꺼내 놓고 글을 쓸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들고 글을 씁니다. 엄지 두 개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카페에서도 키보드로 글을 쓸 수 없더군요.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 분들도 부러울 뿐입니다. 그러니 자유롭게 퍼져 나가는 생각을 바로바로 사진으로 찍어 문장으로 갤러리에 전시할 수 있는 것은 집에서 뿐입니다. 혹은, 호텔방도 매우 좋아합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습니다. 장소는 정해졌습니다. 거실, 호텔방의 책상 의자에 앉아서 키보드를 바르게 놓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것까지가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화면은 글씨만 보이면 됩니다. 키보드만 손에 편하게 놓여 있으면 됩니다. 오늘도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놓을까 했지만, 오늘은 궁극적인, 글쓰기 자체에 대한 생각들을 좁게 가두어 놓고 그 안에서만 뛰어다닌 것 같습니다. 정말 날아다녀야 닿을까 말까 한 커다란 스케일의 생각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그리스 신화가 생각이 난다던지, 일제 강점기의 한글 타자기가 일본어 타자기와 영문 타자기의 영향을 받았는데, 영문 타자기는 영어 알파벳을 쉽게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것은 인쇄술이 만들어지고 한참 뒤, 그 인쇄를 개인화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생겨났으며, 인쇄술 또한 그리스 철자에서 나온 알파벳이 기본이 된 글자들을 찍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결국은 모든 것은 그리스 문자, 페네키아 문자에서 발생했다는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상상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건 아니고, 대략 이렇게 예상하기 힘든, 하지만 거꾸로 가면 왜 그런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갔는지 이해가 가기는 하는 흐름이라는 것이죠.
글을 한참 쓰다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라볼 때 기분이 좋습니다. 생각을 잘 따라잡지 못하면 집중하지 못하고 수시로 방안을 둘러보게 되니까요. 하지만 글을 마무리하고 나면 또다시 그런 기분 좋은 짧은 순간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깨닫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길게 늘여주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오늘의 기분 좋은 글 한 편 쓴 시간이 앞으로 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쓸 수 있게 해주는 목발이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달라진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