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Ritual.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행하는 의식, 루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리추얼이 없으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갑자기 책상정리를 한다던가, 공부 계획을 다시 세우거나 하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리추얼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준비 의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한없이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물리적인 효과 말고도 실제로 리추얼이 끝나는 순간부터 그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라는 스스로와 정한 암묵적인 규칙이 있기 때문에 육상 경기에서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처럼 집중력을 어느 정도 일으키는 효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글을 쓸 때의 리추얼은 간단합니다. 두 손으로 키보드를 바르게 놓고, 양손의 손목을 책상의 앞 모서리 쪽으로 잘 올려놓은 후 손가락을 가볍게 키보드 위에 올렸을 때 양쪽 검지가 'J', 'F'에 놓이도록 키보드를 다시 정리합니다. 그러고 나서 양손의 네 손가락을 모두 'A', 'S', 'D', 'F', 'J', 'K', 'L', ';'에 각각 올려놓고 가볍게 톡톡, 쳐 줍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이러면 글을 쓸 심리적인 준비가 다 끝난 것입니다. 원래 수첩을 쓸 때는 수첩을 잘 펴고 가운데를 꾹꾹 누르는 동작부터 해서 좀 많았는데, 영화 '어카운턴트'에서 주인공이 양손 손가락을 모아서 훅훅 불어주고 끝나는 것을 보고 굳이 복잡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첩 위에 양손을 나란히 놓고 가벼우면서 묵직하게 페이지 양쪽을 꾸욱, 눌러주는 것만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하다고 해서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키보드에 글을 쓰면서부터는 그 동작을 비슷하게 응용해서 쓰게 된 것입니다.
점심시간에 남들이 낮잠을 위해 불을 다 끈 사무실에서 주섬주섬 전자책과 롤리 키보드를 꺼내 책상 위에 잘 펼쳐 놓습니다. 키보드의 위치를 손가락이 바르게 올 수 있게 잘 맞추고 전자책을 거치대에 올렸습니다. 이제 리추얼을 끝내고 글을 쓰는데,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한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언어 변환을 해 보아도 언어변환이 되었다는 메시지만 뜨고 실제로는 영문만 나타납니다. 휴대용 키보드라 'Fn' 키와 함께 뭔가를 누른 모양입니다. 키보드 연결을 끊었다가 다시 연결해 보기도 하고 글을 쓰는 앱을 닫았다 열어 보기도 했지만 한글은 써지지 않았습니다. 화면에 뜨는 키보드로는 한글 입력이 가능했지만 전자잉크 모니터에서 터치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은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수준입니다. 결국 기기 자체를 껐다 켜고 나서야 다시 한글을 입력할 수 있었고, 이미 점심시간은 모두 끝난 상태였습니다. 글은, 이 글의 맨 위 한 문단 쓴 게 전부였습니다.
점심시간을 허비해 버린 것도 속상한 일이지만, 더 신경 쓰이는 일은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찾지 못했으니 다음번에도 기기를 껐다가 켜 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허비하는 시간 동안은 글을 쓸 수가 없겠지요. 정 안되면 핸드폰으로 써야 할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 키보드를 바꿔야 하나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휴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다 놓은 기계식 키보드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플라스틱과 패브릭으로만 이루어진 롤리 키보드가 너무나 가볍기 때문에, 그리고 기계식 키보드는 소음이 심하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모두 잠을 자고 있는 불 꺼진 사무실에서는 어떻게 들릴지 몰라서 가지고 와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키보드와 기기 간의 궁합 문제라면 단순히 키보드만 바꾸어서 쉽게 해결될 문제이기는 합니다.
엘지 롤리 키보드는 십만 원이 넘는 제품인데 우연히 냉장고 가격을 알아보러 방문했던 엘지전자 대리점에서 일 년 간 전시했다며 만 원에 판매한다고 쓰여 있기에 구입했던 제품입니다. 그렇게 구입해서 약 칠 년을 사용했으니 매일같이 사용한 것은 최근 일 년간이기는 해도 제값은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방 속에 항상 3단 우산과 나란히 넣으면 티도 나지 않고 공간도 차지하지 않습니다. 키를 누르는 느낌도 두께에 비하면 입체적이고 좋았지요. 사무실에서도 이 녀석 말고 다른 키보드로는 개인적인 글을 작성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이 들긴 한 것 같네요.
그런가 하면 전자책 제품이 외국에서 만든 것을 수입해다 판매하는 거라서 기본 키보드 기능이 순수한 안드로이드 키보드보다 떨어지다 보니 그게 원인인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구글에서 만든 그대로 들어 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옛날일이지만 구글 순정 태블릿을 사용해 보았을 때도 입력에 특별한 문제가 보인 적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이제 와서 고자질하듯이 폭로하자면, 글을 쓰다가 "했습니다" 같은 말을 쓰면 열에 한 번은 자동으로 "햇씁니다"로 바뀌곤 합니다. 지우고 다시 쓰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그렇다면 이건 키보드를 바꿔서 될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 전자책을 사용하면 늘 따라다닐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 됩니다. 앞으로 테스트해야 할 것들이 무척 많아진 느낌입니다. 이런 걸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글을 쓰는 소중한 시간을 불시에 압수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설마 새 기계가 필요한 건 아니겠지요?